[디지털 시대의 대중문화] 도리도리 춤을 토론에 회부하라
[디지털 시대의 대중문화] 도리도리 춤을 토론에 회부하라
  • 정혁 / 자유기고가
  • 승인 2000.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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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순서
1. 디지털 시대의 광고문법
2. 디지털 시대의 사이버문화
3. 디지털 시대의 문화란 무엇인가

‘전근대’라는 아이가 ‘근대’라는 옷을 입고 ‘탈근대’라는 테크노를 추고 있다. 우스꽝스러운가? 그러나 어차피 우스꽝스러움이란 상대적인 개념 아닌가. 그러니 이 ‘애늙은이’를 그냥 ‘개성’쯤으로 봐주자.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탈근대’라는 테크노를 추다가 ‘근대’라는 옷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라는 것.

근대란, 보편적으로 국민국가(혹은 시민국가)의 완성, 자본제 생산양식의 완성 과정을 말한다. 우리는 제대로 된 주체적 개념의 ‘개인’ 혹은 ‘시민’을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에겐 아직도 전근대적 가족주의를 근간으로 한 강력한 소속 욕구가 지배적이다. 합리에 의한 의사 소통 구조보다 비합리적인 소통 구조, 즉,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한 소통 형태가 훨씬 더 보편화되어 있다. 적어도 근대의 정치적 과제인 국민국가의 완성이 미완이라는 얘기다.
국민국가의 미완, 혹은 시민의식의 미완은 현재 우리에게서 횡행하고 있는 정치 냉소, 지역주의, 연고주의, 정실주의, 가부장제 등과도 일치한다.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사익을 공중에 내놓아 협의와 토론을 거쳐 공익화 하는 과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공익과 사익을 분리시키는 위선적인 구조를 낳게 한다. 이 구조는 분명 악순환적이다.

탈근대 담론이 범람하면서 이 악순환적인 구조가 은폐되는 경향이 있다. 정치 내지 근대의 종말을 고하며 문화의 이름으로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는 이 담론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민적 역량이 부족한 대중에게 그 담론을 스스로 제어할 능력까지 부과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성찰이 결여된 공동체 문화

한 문화권 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동의 문제를 인식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사회적 삶의 방향과 내용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한 문화가 ‘공동체 문화’일 것이다. 공동체 문화는 항상 시민의식, 즉 합리적 개인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에게서 발견되는 공동체 문화는 많은 부분 이러한 계몽된 개인을 제대로 전제하고 있지 못하다.

정작 상품성이라는 단서로 유통되는 공동체 문화는 정치 문화적으로 비교적 주변부에 속해 있던 10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운 시장으로 10대를 주목한 것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이들이 스타를 중심으로 형성하는 공동체, 이른바 팬클럽들은 종종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타인의 시점이나 가치를 용인하지 않는 이러한 행태는 역으로 자본의 기형적인 유통을 공고히 할뿐이다.

반면 기성세대에게 이러한 대중문화들은 대체로 외면되고 있다. 그러나 넓게 보아 사이버 매체를 통한 구현이란 측면에서 이들 역시 사이버 문화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다만 그것이 경제 분야에 집중되어 있을 따름이다. 급성장하는 이러한 추세 역시 제조업 위주의 실물 경제에 대한 통찰이 거의 도외시되고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10대가 되었든 기성세대가 되었든 공익과 사익의 투쟁의 장인 ‘공동체 문화’를 향한 우리의 몸부림에는 자기 성찰이 많은 부분 결여되어 있다. 개인에게 있어 ‘근대’의 철학적 가치는 타인과의 끊임없는 의사소통을 통한 자기 성찰에 있다 할 것이다. 자기 성찰은 발전의 호흡과 속도를 조절해 주고 긴 안목의 통찰을 부여해 준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일천하다면 쉽게 달아 오르고 쉽게 식어 버리는 ‘냄비’ 신세로 전락하기 쉬울 따름이다. 이 냄비가 최근 몇 년 사이 거품을 물고 끓여댄 것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사이버 문화일 것이다. 이 짬뽕 냄비도 식을 날이 있을까. 그거 참 두려운 일이다.

사이버 문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

한 극우언론이 전직 학자였던 현 정부의 한 관료를 빨갱이로 몰아 낙마시킨 사건은 아직도 스산하기 짝이 없는 한국 사회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별로 매체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와 관련된 매우 의미 심장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연전에 빨갱이 사냥에 동원되었던 한 기자가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한 지식인과 언론사를 고소, 1심에서 명예훼손이 인정되어 배상판결이 내려진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일단의 반응을 보인 것은 사이버 공간에서 결성된 ‘네티즌’들이었다. 한 월간지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활발한 토론과 논쟁을 주고받던 이들은 그 기자의 명예훼손을 “자기가 해결해야 할 논리적 문제를 슬쩍 법적 문제로 둔갑시켜 교묘하게 피해가려는 고도의 지능적인 전술”로 규정하고 “두 개인 사이의 사적인 민사소송으로 축소되지 않고,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데에 필요한 공적인 싸움으로 인식이 되도록” 배상금 모금운동과 ‘맛동산 보내기 운동’이라는 진지하면서도 비교적 유쾌한 운동을 벌였다. 이들 속에는 지식인도 있었고 아줌마도 있었으며 회사원도 있었고 학생도 있었다.

이들이 내건 주장의 옳고 그름은 일단 유보하기로 하자.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타인과의 언로를 열어 놓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하나의 합의를 일구어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고소를 한 기자가 게시판에 들어와 네티즌과 벌인 논쟁은 그 결과와는 별개로 참으로 휘황한 장면이었다.

선택의 과학, 토론에 회부하라

미국의 사회문화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래시는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보란 토론을 통해서만 창출된다고 했다. 우리가 올바른 질문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사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공중 토론의 시험에 회부하는 것뿐이며 논쟁에 끼어 들어 사나운 정보 추구자가 되지 않으면 오로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뿐이라고도 했다.

사이버 공간은 일단, 정보의 쓰레기장이다. 이 난지도를 어떻게 여행하느냐에 따라 개인과 공중의 성장이 결정된다. 선택에 따라 비생산적이고 자기 소모적이며 피폐하기 짝이 없는 여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선택에 따라 올바른 질문을 좇으며 여러 토론과 논쟁을 통해 다양한 인식의 장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버 문화를 바라보는 입장은 대체로 두 가지 극단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극단적인 거부, 혹은 극단적인 찬양. 극단적인 거부든 극단적인 찬양이든 분명한 것은 사이버 공간이 공중토론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활용의 문제이지 본질 규정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공중토론은 자발적인 ‘계몽’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형식체제이다. 우리의 역사는 자의든 타의든 그간 이것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에겐 토론이 낯설다. 마땅히 공중토론에 회부해 해결되어야 할 많은 문제들이 힘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그로 인해 여전히 많은 수의 인권이 부당하게 억압받고 비판 기능을 수행해야 할 지성 역시 전근대적인 힘을 추종하는 괴이한 풍토를 연출해 왔다. 공중토론의 실현은 미완의 근대, 한쪽 바퀴에 바람을 채워 넣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소위 ‘도리도리’ 춤을 추고 있노라면 이러한 골치 아픈 것이 믹싱되어서 세상이 황홀해 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춤을 멈추자. 그리고 이 ‘도리도리’ 춤마저 토론에 회부하자. 이거 너무 어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