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촌맺기] 기계공학과 박성진 교수
[일촌맺기] 기계공학과 박성진 교수
  • 정해성 기자
  • 승인 2009.11.18 21: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스텍과 함께 한 20대…꿈을 갖고 돌아온 모교

우리대학의 ‘1회 수석 졸업생’, 그리고 이번학기부터 기계공학과 교수로 부임한 박성진 교수를 만나보았다. 활짝 웃으며 기자를 맞아주는 그의 모습에 교수님을 대한다는 어려움을 떨치고 친근하게 질문할 수 있었다.

- 우리대학의 개교당시 모습은 어땠나?
“처음에 입학했을 때 건물이라고는 공학 1동과 기숙사 4개 동이 전부였습니다. 공학 2~5동은 공사 중이었죠. 여학생기숙사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여학생들은 기숙사 4동의 3층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계단은 남학생들이 사용하는 계단과 별도로 외부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도로로 덮이게 되었지만 청암학술정보관과 철강대학원이 있는 큰 길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죠. 그때와 비교하면 나무들도 많이 자랐네요. 동아리가 있기 전이었기 때문에 기숙사 층별로 친해져 너나 할 것 없이 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영화감상 동아리를 만들어 영화도 즐기고 영어공부도 하곤 했습니다. 효자시장은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여요.”


- 자리를 잡지 못한 신생대학에 어떻게 지원을 하게 되었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시험을 봤을 때 서울대 일부 학과를 제외하고는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었습니다. 원자력공학과를 지원했는데 떨어져서 재수를 하게 되었죠. 1년의 재수생활을 하고 다시 본 시험에서 성적이 고3 때 시험을 봤을 때보다 낮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입시지원서를 쓰는 도중 포항공과대학교가 설립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든 생각이 작년에는 못 갔을 대학에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대학에 지원하게 되었고 합격을 했죠.”


- 첫 입학생의 학교생활은 어땠나?
“처음 입학을 했을 때 교수님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해주셨습니다. 개교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이라 불안감도 없진 않았지만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죠. 당시 많은 대학들이 데모를 했지만 우리대학 학생들은 데모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놀 거리도 없어 공부 외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영어수업은 고등학교 때와 달리 영어로 진행되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습니다. 처음 보게 된 물리 원서는 정말 막막했죠.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교련수업도 있었어요(웃음). 그때는 성적이 나오면 전체에게 공개했습니다.”

- 수석졸업을 하셨는데, 학교생활은 어떻게 했나?
“저의 경우 20대를 모두 이곳에서 보냈죠. 처음 입학했을 때는 원서를 보기가 힘들었고 영어수업이 영어로 진행되어 공부하기가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1학년 1학기에 수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기태 교수님이 저의 학부 때 지도교수님이셨는데 2학년부터 전공과목을 듣게 되었을 때 다른 학과 교수님들께 전화를 걸어서 선택과목들을 추천해주시는 등 많은 신경을 써주셨습니다. 대학생활을 유유자적하게 즐겼고, 교과서의 문제는 모두 다 풀었습니다. 교과서는 수업시간에 강의하지 않은 부분까지 모두 공부를 했고요.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기이고, 성적은 이 기본기의 싸움이죠. 그리고 그날 나온 숙제는 거의 바로바로 했습니다.
학부 3학년 때에는 카네기 멜론대에 한 학기 동안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외국이라 학생들이 모두 뛰어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서 공부를 해보며 비교했을 때 우리대학 학생들이 더 뛰어나다고 느꼈습니다. 김기태 교수님의 권유로 들은 Unix와 C언어가 많은 도움이 되었고, 그 학교의 친구들도 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이것저것 도움을 구하더군요. 이 유학 경험은 제가 자신감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우리대학에서 교육을 잘 받아 어디에 가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 어떻게 우리대학에 부임하게 되었나?
“황운봉 교수님께서 교수채용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시면서 모교에서 일할 생각이 있으면 지원할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저의 대학원시절 지도교수님이셨던 권태헌 교수님의 인격과 실력이 제가 모교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미국에서 좋은 제안을 받았습니다. 미시시피주립대 자동차연구소의 Associate Director 자리였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하니, 3년간 저를 지켜보고 충분한 평가를 해서 제안을 한다고 하더군요. 사실 미국에서의 제안과 비교하면 포스텍에서 제안 받은 조교수 자리에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제가 우리대학에서 배웠던 것처럼 후배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에서 뜨거운 열정이 생기더군요. 모교에 가서 잘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며 연구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준다면 우리나라 교육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후배들이 저보다 더 잘되게끔 가르치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꿈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 미국에서 확실한 기반을 잡으셨는데,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
“미국은 한국에 비하면 여자와 아이들이 살기 좋은 곳입니다. 저희 가족은 도시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환경과 주거환경, 자녀교육 면에서 좋은 환경 속에 있었고, 미국에서 기반을 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결국 저의 생각을 따라주었고, 우리대학의 교수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기회들을 접고 모교에 왔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 후배들이자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포스테키안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단기유학ㆍ섬머세션 등 학교에서 제공하는 여러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포스텍이 정말 좋은 학교라고 말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하십시오. 포스테키안으로서의 확실한 정체성과 경험들로 여러분들은 외부에서 보는 포스텍에 대한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포스텍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낙오자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중요하고 모두가 최고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 대학시절에 어떤 이상을 품었나?
“대학시절에는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누구보다 잘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최근에는 다른 이상을 하나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기회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는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특수교사입니다. 실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장애인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교수로서의 모습은 물론 그의 인간적인 모습도 느낄 수 있었던 인터뷰였다. 모든 포스테키안들이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대학이 최고의 대학의 될 날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를 거닐다 그를 본다면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해보자.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 인사에 교수님은 모교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