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느림에 관하여] 속도 싸움에 지친 이들이여, 느림의 미덕에 몸을 맡기자
[서평-느림에 관하여] 속도 싸움에 지친 이들이여, 느림의 미덕에 몸을 맡기자
  • 김혜리 기자
  • 승인 2000.09.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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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속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말에 반격이라도 하듯 ‘느림’이라는 화두는 출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느림의 지혜> <떠남과 만남> <단순하고 조금 느리게> 따위의 책들이 서점 진열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사용자의 확산과 더불어 ‘빨리빨리’의 달갑지 않은 풍조가 더욱 확산되고 있고, 빛의 속도를 지향하는 현대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느림’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진입하고 있는 것은 바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우리들의 마음을 달래고 여유에의 욕구를 대리충족 시켜주기 때문이다.

1995년 출간된 밀란 쿤데라의 <느림>은 가속도가 붙어 돌아가는 사회에 살며 어찔해하던 사람들에게 ‘느림의 미학’이라는 신선한 충격을 몰고온 책이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기계적으로,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이 구절을 읽을 때 현재를 망각하며 살아온 우리는 잊기 위해 쉼없이 달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무엇을 잊고 싶은 것인지, 왜인지를 되돌아본다. 쿤데라는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라고 탄식하며 한없이 게을러지라고 제언한다.

독일 교육학자 칼하인츠 가이슬러가 쓴 <시간>은 `빠름’에게 지배당하는 현대인에게 `느림’의 가치를 일깨우는 에세이집이다. `빠름’이 지닌 창조성을 인정하면서도 사회를 파괴하는 폭력으로 변할 수 있으며 빠름과 느림이 조화되는 삶을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리게 살 줄 아는 것을 능력이라 말하고 있다. 느림은 우리에게 시간에다 모든 기회를 부여하라고 속삭인다. 여기서 문제되는 느림 또는 고요함은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두르지 않는 의지, 시간이 뒤죽박죽되도록 허용치 않는 의지, 그리고 사건들을 대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과 우리가 어느 길에 서 있는지 잊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느림’과 ‘빠름’은 가치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속도를 이야기할 때 지금은 디지털의 가치를 빼놓을 수 없다. 백지연의 <나는 나를 경영한다>에서도 그녀는 디지털로 얻은 시간을 아날로그로 쓰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 점에서는 <아톰@비트>를 쓴 정진홍 교수의 의견과도 일치한다. 디지털세상이 펼쳐지면서 속도가 가치를 창출한다. 속도를 내는 궁극적 이유는 여유와 느림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속도로써 확보된 느림을 즐기고 새로운 창조의 모태를 만드는 것이 ‘속도의 미덕’이라는 것이다. 속도를 위한 속도는 의미가 없다.

이러한 책들이 한결같이 담고 있는 것, 공통분모는 바로 인본주의다. 디지털, 빠름에서 비롯되는 정신의 공허함을 꼬집고 있기에 이 책들은 간단한 한마디 ‘느림’으로도 크나큰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또 ‘느림’은 일상의 분주함을 거부하고 느린 몸짓으로 정자를 찾아가는 우리네 조상들의 여유와 한걸음 더 나아가 동양철학에서 내세우는 내면적 성찰과도 같은 선상에 놓인다. 사라져가는 무수한 것의 대명사, 느림은 ‘인간’을 의미한다.

바쁘지 않게 여유롭게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이제 힘들지 않은지 돌이켜보자. 권태로움을 즐겨라/천천히 기다려라/지난 시절의 한 부분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라/한없이 게을러지라 등의 권유사항을 한번 실천해본다면 단번에 ‘느림의 미덕’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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