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리뷰-제 5회 부산 국제 영화제] 영화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는 행복
[문화 리뷰-제 5회 부산 국제 영화제] 영화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는 행복
  • 박정익 / 전자 3
  • 승인 2000.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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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회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10월 6일에 개막하여 일주일간의 축제를 시작했다. 사실 포항에서도 그리 가깝지 않은 부산까지 영화 몇 편을 보러 힘들여 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취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감히 영화감상이라고 대답하는 나에게 이번 영화제는 피할 수 없는 어떤 의무 같은 것이었다. 어쨌든 다양한 생각들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영화를 보고 공감하고 엔딩 크레딧을 올리며 박수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시아에 살고 있지만 아시아 영화에 너무나 낯설다. 영화제의 모든 영화가 시작되기 전 잠깐 상영되는 가벼운 홍보물에서처럼 우리는 헐리우드의 햄버거 영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아시아영화 80편(한국영화 제외) 포함 55개국 210편의 화려한 잔칫상에서 내가 자의든 우연이든 선택하게 된 메뉴들은 <빵과 장미>, <당신의 영원한 친구, 해리>, <레이카비크>, <종이>, <댄서>, <뱀파이어 헌터 D>, <사랑에 관한 이야기>, <어둠 속의 댄서> 8편이다.

<종이>(China, Ding Jiancheng)는, 나의 졸음과 상관없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상당히 의미 깊은 영화라고 한다. 현실과 환상, 흑백과 칼라를 넘나들면서 - 끔찍하게도 <검으나 희나 땅에 백성>을 보는 꿈을 꿨다. - 종이를 매개로 인생을 말했다는 이 실험 영화는 감독과의 대화시간에서의 고백에 의하면 돈이 없어서 깨끗한 종이 대신 벽보를 뜯어서 소품으로 썼고 칼라보다 흑백으로 많이 찍었다고 한다. 가난한 영화 <종이>는 바로 PPP(Pusan Promotion Plan, 아시아의 유망한 영화들이 전세계의 공동제작자나 공동 투자자를 만나는 pre-market)를 통해서 완성된 영화이다.

영화제가 열리는 남포동의 영화관 밀집지역인 PIFF광장 대영시네마 앞에는 영화제 동안 화이트 보드가 서있다.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의 표를 열망하는 혹은 게으른 사람들이 필요 없게 된 표를 가진 자를 만나는 벼룩시장이다. 당신이 부산국제영화제동안 어떤 영화를 보고 싶다면 당일 표의 임시 판매소에 줄을 서는 것보다 이곳을 찾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단, 혼자일 것. 그리고 뻔뻔할 것. 이 게시판 앞에 서면 대번에 이번 영화제 최고의 인기작을 알 수 있다. 1회 <공각기동대>, 3회 <쾌락과 타락>, 4회 <거짓말>에 이어 PIFF 2000의 최고 인기작은 <뱀파이어 헌터 D>(Japan, Yoshiaki Kawajiri)이다. 나의 뻔뻔함 덕분에 가와지리 요시야키 의 신작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보는 관객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가와지리 요시야키는 <요수도시>, <수병위인풍첩>(국내 개봉명 <무사 쥬베이>)등 ‘Gore Japanimation’의 감독이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경계에 있는 헌터 D가 어떤 뱀파이어와 그를 사랑하는 인간 여자를 쫓는다.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 있다. 그들의 처절한 로맨티시즘과 전율케 하는 화려하고 빠른 액션이 돋보인다. 프란시스 코폴라의 등 흡혈귀 영화들의 세계적 공감대의 틀 안에서 Japanimation의 자극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 해내 세계 특히 미국을 겨냥한 시장 공략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올해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어둠 속의 댄서>(Den mark, Lars Von Trier)는 해운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야외 상영되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영화가 시작되자 바닷바람과 함께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야외 상영장을 만들었건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제측에서는 준비한 우비를 입은 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잔인하게 사실적이면서 환상적인 영화들 골든 하트 3부작(<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의 마지막 편인 이 영화는 그 수난극 안에서 기묘하게 헐리우드의 뮤지컬을 껴안고 있다. 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결합을 Dogma적으로 찍어 내다니 영화 형식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내 삶안에 내 아름다운 노래가 계속된다. 마지막이라 말할 때까지.

영화를 단 한편도 못 보게 되어도 영화제가 재미있을 수 있는 이유의 큰 부분은 아마 유명 영화스타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가와지리 요시야키를 10센티 앞에서 스쳐 보내고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을 5미터 앞에서 보게되다니! 완전 매진이었던 그의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의 감독과의 대화시간에서 Ich liebe dich 라는 소릴 들을 정도의 멋진 세계적 감독 빔 벤더스를 말이다. 임권택 감독과 춘향전의 배우들, 김정현등 청춘의 배우들도 그곳 영화의 거리를 인파로 덮게 만든 스타들이다. 그 거리를 다시금 지나가면 외국인을 디지털 카메라로 인터뷰하는 한 여고생의 유창한 영어발음, 온몸에 금색 페인트 칠을 한 행위 예술, 곧 개봉할 우리 영화 <하면 된다>를 홍보하는 쪽팔려 하던 5명의 아르바이트 생들, 스크린쿼터 유지 서명 운동 Booth 등이 작은 단상으로 남는다.

당신이 나와 함께 다음 어떤 영화제에서 이런 것들을 공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