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의 방학나기-지리산 여행기] 산은 왜 지리산이라 했던가
[포스테키안의 방학나기-지리산 여행기] 산은 왜 지리산이라 했던가
  • 유종수 / 물리 3
  • 승인 200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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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린 배는 과자로,
목마름은 하얀 눈으로 달래며
오른 노고단은 우리에게
지상에서 최고의 감동을 선사했다

객관적으로는 짧고 박한 우리의 인생을 주관적으로는 풍성하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여행이다. 그리고 그 여행을 혈기 넘치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날에 많이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인생에서 귀족과도 같은 위치를 누리는 자가 아닐까. 그많큼 우리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출발하기 전에 설레임과 도중에의 즐거움은 둘째로 두고서라도 말이다. 이런 행운을 누리기 위해서 모두들 거리로, 거리로 나올 황금같은 크리스마스 연휴에 전국에서 솔로 남녀 4인이 모이게 되었다. 목표는 지리산 천왕봉에서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저 낭만으로 똘똘 뭉친 것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은 그간의 여행으로 이미 가슴 속에 새겨질만큼 새겨져 있건만, 왜 출발전에는 그렇게 즐거운지 모를 일이다. 아마 여행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자유와 자연의 향기 등이 나의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일행들이 먼저 도착한 장소는 화엄사 입구. 당초 일정으로는 노고단 산장에서 1박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오후 늦게나 도착해서 그만 근처 한 민박집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자들의 단장은 비난의 대상은 될 수는 없겠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여 기다리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다음 날, 일찍 산으로 출발하려 했던 우리의 계획은 그렇게 여성들의 아름다움의 대가로 희생이 되어 또 늦어지고 말았다. 막 노고단으로 출발하려는데 민박집 아주머니가 가만히 이른다. 아무 것도 없이도 힘드는데 그렇게 무거운 짐들을 짊어지고 오르겠냐고. 그만큼 화엄사 뒤로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은 힘이 든다. 그러나 우린 젊음으로 오르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떠났다.

여행에서 고행이란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다. 젊은 날의 여행이란 두고 두고 추억이 되기 마련인데, 그 추억은 고생이 심할수록 인생에 더욱 더 깊게 담겨지게 된다. 4시간 30분 정도 주린배는 과자로, 목마름은 하얀 눈으로 달래며 죽을 고생을 한 끝에 노고단 근처 큰길로 접어들었을 때의 그 설경의 아름다움! 눈은 넓은 길에 소복히 쌓여 있고, 눈발은 간간히 눈앞을 자극하며, 길 옆 나무에는 가지가지 눈꽃이 만발한 그 모습에 일행은 저마다 감탄사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 감탄사에는 조금의 과장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포함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최고인 것이었으니. 아마 이런 감동은 노고단 근처까지 번개같이 차로 달려와 평평한 큰길을 유유히 걸어온 사람들은 감히 접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편한 미소만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미소마저 풍경 속의 하나로 생각하며 감동을 느꼈다.

산장에서 주린 배를 채운 후 우리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이미 2시에 가까운 시각, 당초 목표였던 연하천까지는 5시간 이상이 걸리기에 부지런해져야 했다. 하지만 피곤에 지쳐서인지 뱀사골 산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하다. 난 천왕봉에 예정대로 가고픈 마음에 연하천으로 일행을 독려했지만, 곧 추위와 어둠에 눌려 뱀사골 산장으로 쓰라린 후퇴를 해야 했다.

산장에 가니 사람들이 밖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저마다 올라온 길은 다르지만 대다수가 예약을 하지 않은 것을 보니 우리처럼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것 같다. 밖에서 오돌오돌 떨며 설익은 김치찌개와 밥으로 배를 채우는데, 한 인상 좋은 형이 와서는 즉석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주신다. 애인에게 지리산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다는데, 남은 필름으로 다른 팀들의 사진을 찍어주시는 것이었다. 그 형의 활약으로 추웠던 뱀사골 산장은 따뜻해졌다. 산장지기 아저씨마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바깥의 쌀쌀한 날씨를 잊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산에서는 사람들끼리 금방 친숙해진다. 다만 같은 곳을 오른다는 이유만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마음을 터놓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산장 안에서 오래 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석유난로 앞에 모여 얼었던 손발을 녹이고 있었는데, 술이 적당히 취해 기분이 무척 좋은 몇 분이 들어오셔 곧 어울리게 되었다. 그 중에 한 커플은 내 친구와 동향이라 곧 그 넉살좋은 녀석과 친해졌고, 사진을 찍어주셨던 형은 다시 새로운 필름으로 아늑한 가스등 빛을 배경으로 그 커플과 산장지기 아저씨, 그리고 우리 일행의 사진을 근사하게 찍어주셨다. 그렇게 좋은 사람들 속에서 정말 크리스마스 이브 같은 밤을 우린 보냈다. 다음 날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에게 주어진 건 물기를 말리느라 걸어뒀던 양말 속의 산타의 선물이 아니라 많은 양의 눈이었다. 15cm 가량의 눈이 쌓여있는 가운데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마냥 좋기만 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어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다들 위험하다며 천왕봉을 포기하고 하산을 결심하는 통에 그만 우리도 아쉬웠지만 천왕봉을 포기하고 그들을 따라 하산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우리의 여행은 결코 작지 않은 에피소드로 마무리가 되었는데, 뱀사골에서 남원으로 나가는 우리가 탄 버스가 그만 사고를 낸 것이었다. 가드 레일을 들이받고 10여 미터를 진행한 후 막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 다행히 앞에 있는 전봇대를 들이받고 버스가 멈춰 큰 사고가 되지는 않았지만 정말 아찔했다. 친구 말대로 그 전봇대가 산타의 선물인지도 모를 일이다.

산은 지리산. 이 말의 뜻을 이번 여행에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같은 코스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힘내세요’ 같은 따뜻한 인사말을 주고받는 그 따스함 뿐 아니라, 코스가 길어 대개 산장을 거쳐야 하 는데 그곳에서 등산으로 지친 몸을 사람의 온정으로 달랠 수 있는 즐거움이 바로 지리산을 최고로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경치의 빼어남이 최고라 말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조만간 지리산을 다시 찾아 천왕봉을 오를 생각이며, 그 이후에도 종종 난 지리산에 오를 것이다. 그 때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리산을 최고로 느끼게 해줄 따뜻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조용히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