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봐도 난 너무 완벽해!
내가 봐도 난 너무 완벽해!
  • 박지용 기자
  • 승인 2009.05.06 2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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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곳곳에 만연한‘나르시시즘’

이 세상이 모두 자신만을 위해 존재
미니 홈피
·블로그 통해 스스로 만족

어느 작가가 친구를 만나 오랫동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무 내 얘기만 했군. 이젠 자네 얘기 좀 하세. 자넨 이번에 나온 내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에리히 프롬의 시대에 유명했던 농담이라고 한다.
이는 나르시시즘의 모습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나르시스트에겐 이 세상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어느 날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그만 연못에 빠져죽었다는 청년 ‘나르키소스’가 바로 나르시스트의 원조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지독한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나르키소스의 후예 한두 명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래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용어는 정신질환에 이를 정도의 지나친 자아상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며, ‘자기애성 인격 장애’라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의해 연구되고 발전된 개념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자기중심 또는 자아도취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사회는 ‘나르시시즘의 사회’라 불릴 정도로 사회 곳곳에 나르시시즘이 만연해있다. 사회 속에서 이런 나르시시즘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I'm so hot. 난 너무 예뻐요”라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원더걸스’의 <so hot>에서는 노골적으로 나르시시즘을 드러낸다. “피하려고 애를 써도 느껴지는 나의 Rainism. 넌 이제 빠져 버렸어”라는 ‘비’의 <Rainism> 역시 ‘나’ 중심의 자신감이 넘쳐난다. 당시 이 노래처럼 자기 이름에 ‘~ism’을 붙여 자기만의 모습을 드러내던 유행은 나르시시즘의 전형이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그의 모습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과 신격화는 그를 통해 마치 자기가 그러한 양 자기만의 환상을 충족하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최근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미니홈피와 블로그는 나르시시즘의 완결판이다.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휴대폰 등의 발달로 1인 매체화가 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에 자신의 사진이나 생각 등을 올리며 스스로에 대해 만족감을 느낀다.
나르시시즘이 개인적인 측면을 넘어서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나는 언제나 옳다”는 오만에 빠져 ‘나’의 주장은 관철돼야 하며, 지금 반대하는 국민도 결국 ‘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현 정치인들의 모습은 파괴적인 나르시시즘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은 그 자체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 즉 자기애는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인들에 의해 얘기되어왔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르시시즘이야말로 동물로서 모든 본능을 상실한 인간의 제2의 본능’이라 했으며, 장자는 <제물론>에서 ‘내가 없어도 세상은 존재하지만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내 세상이 가장 중요하다.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르시시즘’이 아닌 ‘건강한’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건강한’이 빠진 나르시시즘은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자기만 바라보다가 호수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나르시시즘 끝에는 자멸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르시시즘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이에게 샌디 호치키스의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을 추천한다.

박지용 기자 kataruis@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위한 제언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심리적 동인
‘나비효과’처럼 커다란 파장 일으켜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존재다. 그리고 물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것을 주제로 어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한 사람에게 길을 가다가 방향을 물어보게 했다. 잠시 후 커다란 광고판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고, 그 동안 길을 물어보던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전혀 다른 얼굴, 심지어 20대가 50대로 바뀌고 남자가 여자로 바뀌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100% 상대방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실험은 사람들은 우리가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겁을 내고 있는 것처럼(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지를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그만큼 자기중심적이고 나르시시스틱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를 심리적 장애와 연결시키고 나르시시즘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19세기 후반의 성(性)의학자 해블록 엘리스와 빌헴름 네케로 알려져 있다. 병리현상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을 심도 있게 연구한 사람은 물론 프로이트였다. 그런데 그 후 하인츠 코후트나 에리히 프롬 같은 학자들은 나르시시즘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르시시즘이 오히려 정신적인 건강함을 나타낸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 역시 정신과 의사로서의 오랜 임상경험을 통해 나르시시즘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심리적 동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벌써 몇 년째 나르시시즘과 인간관계, 나르시시즘과 리더십, 나르시시즘과 자기 계발 등을 주제로 책을 쓰기도 하고 강의도 해오고 있다.


나르시시즘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기애’를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일차적으로 세상보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 그런 뜻에서 매우 자기중심적이며 중요한 존재로서 자신이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것이 충족되면 웬만한 일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정신적 갈증이나 배고픔도 느끼지 않는다. 당연히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건강하고 긍정적이다. 남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커진다.
반대로 나르시시즘이 만족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그 허기와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 우리가 상처받고 아파하고 흔들리는 진짜 이유도(겉보기에 백만 가지 이유가 있다 해도) 딱 하나 이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따라서 우린 누구도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격심한 상처를 입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나르시시즘에도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해 낸 것이 나르시시즘의 나비효과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의 저 유명한 이론처럼 나르시시즘의 적절한 활용이야말로 우리의 인간관계와 리더십 등에 나비효과만큼이나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더구나 나르시시즘의 나비효과는 긍정적인 면에서 더욱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사소하지만 친절한 말 한 마디를 건네거나, 따뜻한 격려와 칭찬을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관심, 작은 칭찬, 작은 격려가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을 움직이는 핵심 심리인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나르시시즘의 충족은 때로 한 사람의 인생에 나비의 날개 짓이 폭풍을 일으키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와 리더십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은가? 그렇다면 건강하고 긍정적인 나르시시즘이 일으키는 나비효과의 파장을 늘 기억하고 또 최선을 다해 실천하려고 노력할 것을 권한다.

양창순 / 의학박사·대인관계클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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