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평론] 영화 ‘Billy Elliot’-상투적 요소를 제압하는 감동과 눈물의 향연
[나도평론] 영화 ‘Billy Elliot’-상투적 요소를 제압하는 감동과 눈물의 향연
  • 이재윤 / 생명 4
  • 승인 2001.03.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영화는 흡사 촌부(村婦)의 궁상스런 자식자랑을 연상시킨다. 논 팔고 소 팔아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으며 고생고생 공부시켰더니 요번에 서울 대기업에 취직했다 어쩌구 하는… 물론 이 영화는 젊은 관객의 짜증을 유발할만한 청승맞음 대신 세련되고 때로는 단호한 화술로 진행되는 현명함을 보인다.

예컨대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절박한 상황에서 흘러나오던 The Clash의 경쾌한 펑크 은 시대의 암울을 볼모로 우리의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발랄함은 그것이 소년 빌리의 시선에서 관찰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 덕분에 그 장면은 탈현실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11세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와 형이 밖에서 벌여야 하는 몸싸움과 곤봉세례의 의미와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카메라가 형과 아버지의 세계, 현실의 세계에 포커스를 맞추면 영화는 여지없이 신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한다.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으로 향하는 아버지가 형과 뒤엉켜 통곡을 하는 장면은 언제 손수건을 꺼내야 하는지에 대한 친절한 강요라는 신파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영화가 현실과 탈현실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는 솜씨는 참으로 절묘해서, 무산계급 출신의 입지전적 출세기라는 진부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들이 처한 절망적 시대상을 외면하지 않고, 동시에 한 어린 예술가의 춤에 대한 열정까지 한 화면에 잡아내는 뛰어난 완성도를 보인다.

감독의 두 손엔 흥행과 비평적 찬사라는 두 마리의 토끼가 쥐어졌고 ‘규모의 경제학’이 영화제작의 정설로 자리잡은지 오래인 요즘, 보기드문 미덕을 갖춘 영화라는 평가엔 나도 동의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영화는 사기에 가깝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 갈수록 “켄 로치가 만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에서 후자에 힘이 실린다. 켄 로치의 <레이닝 스톤>에서 실직중인 아버지가 고생 끝에 얻은 것은 단지 한 벌의 성찬식 드레스 뿐이지만, 이 영화에서 탄광 노동자인 아버지는 내용이 생략된 수고로움의 댓가로 아들을 발레라는 부르주아 예술의 정점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천만다행 우리의 빌리는 성공을 할 수 있었지만, 상상해보자. 발레의 주연으로서 화면 가득 아름답고도 힘찬 몸짓을 펼쳐보임으로써 빌리가 발레리나로서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마지막 장면 대신 로열발레학교의 막대한 교육비를 감당못해 자퇴를 하게 된 빌리의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을 차지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암담하고 불쾌했을까?

물론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희생은 감동적이지만 한 가족의 희생으로 자식이 성공한 확률은 얼마나 될까? 만약 이 영화의 상황에서 아버지가 희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아버지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런 아버지가 야박하다고 생각된다면 야박한 건 아버지인가, 아니면 부정(父情)을 가로막는 척박한 현실인가? 사랑하는 아내의 유품을 땔감으로 써야할 만큼 가혹한 가난과 끝날줄 모르던 파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성공의 열매를 함부로 수확하게 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상업적 타협이다. 결국 이런 영화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주는 감동과 눈물의 향연은 저항하기 힘들 만큼 매혹적이다. 그러니 자, 의자 깊숙히 엉덩이를 밀어놓고 손수건을 꺼내자. 무덤덤한 가장들 조차 울리고야 만다는 소문의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옆 자리의 아가씨들은 연신 눈밑을 닦아내며 연민의 감탄사를 뱉어낸다.

나는 궁금해진다. 20여년 전 남의 나라 노동자들의 별스러울 것도 없는 가난에 눈물 흘리는 저 사람들은, 바로 오늘도 신문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우리나라 정리 해고자들의 피끓는 분노와 절망에도 눈물 흘릴까? 노동시장 개혁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리 없는 소재가 왜 남의 나라 이야기일 때에만 슬픈 것일까?

문제는 슬퍼할래야 슬퍼할 만한 영화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빌리의 가족보다 덜 비참할 것도 없는 수백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내몰리고 서울역에 노숙자가 넘쳐나던 98, 99년과 또 다시 결식아동이 늘어나고 있는 2001년, 우리는 어떤 한국영화를 볼 수 있었던가/있는가? <여고괴담>이나 <주유소습격사건> 같이 전혀 현실감각이 없는 영화들, 혹은 <박하사탕>이나 <춘향뎐> 같이 과거속에서만 헤매는 영화들, 혹은 <비천무>나 <리베라메>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켄 로치나 마이크 리 정도의 영화는 고사하고, <빌리 엘리어트>같이 공감할 수 있는 동시대성을 가진 상업영화라도 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겐 결국 희박한 성공의 가능성 속에서 빌리 엘리어트 같은 운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꿈꾸거나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그저 머리를 비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