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엿보기- 친일 예술인의 도덕성] 도덕성이 없는 예술이 무슨 예술인가?
[문화 엿보기- 친일 예술인의 도덕성] 도덕성이 없는 예술이 무슨 예술인가?
  • 박정준 기자
  • 승인 2001.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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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타계한 미당 서정주를 뒤따르듯, 운보 김기창도 올해 1월 말 유명을 달리했다.

한 사람은 한국 시단의 거목으로서, 한 사람은 우리나라 화단의 거장으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인물들이다. 미당은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표출함으로써 그 이름을 떨쳤고, 운보는 귀머거리란 장애를 딛고 청록산수, 바보산수 등의 독자적 예술 영역을 개척하며 남긴 2만여점의 작품을 통해, 동양화와 서양화의 이분법을 초월한 한국화의 새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더 이상의 미사여구가 붙을 수 없을 만큼 이토록 칭송을 받는 이들의 이름에도 항상 따라붙는 오명(汚名)이 있으니, ‘친일 예술인’이 바로 그것이다.

혹자는 그들이 일제 하에서 어떤 행동을 했던 간에 그들의 예술성과 업적이 그것을 덮을 만큼 뛰어나다고 칭송하기도 한다. 혹자는 예술은 예술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한다.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고, 그들의 장점은 나름대로 우리가 지켜보고 평가해주어야 하며, 거기에는 어떤 시비도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일제 치하에서 부역을 했던 인사들의 공통된 변명이 있으니, 김 기창 스스로 말했듯이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요”(경향신문, 1991. 8. 3)라는 환경지배론(環境支配論)이 그것이다. 그리고 서정주 또한 “‘이것(편자주: 일제에 순종하는 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라며,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 자기 합리화를 했다.
이들은 일제의 정점인 1940년대부터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지런히 찬양하고 고무하기 시작했다. 미당 서정주는 [징병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항공일에] [헌시] [보도행] [오장 마쓰이 송가] 등의 시를 부지런히 생산해냈고, 운보 김기창도 전시 기금 조성을 위한 전람회 등에 부지런히 참가함과 아울러, 신문 잡지 등에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 8. 6)나 [총후병사](1944. 4)와 같은 삽화들을 그리며 군국주의 칭송에 앞장섰다.

그들의 사후, 유력 언론들에 나오는 기사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업적과 예술성을 칭송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들의 일제 치하 과오(過誤)들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찾아보기도 힘들다. 이때 우리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옥중에서 숨진 윤동주와 같은 인물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예술가들도 일제에 협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거기에 더 이상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그들은 죽기전에 뉘우칠 필요성이 없었던가?

물론 일제의 광기가 절정에 달하던 40년대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에게 조국의 광복이 멀지 않았다는 불굴의 신념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천연덕스럽게 거기에 협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 용서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전후 처리 과정 중에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떠돌았다고 한다. “같은 대독협력자라도 히틀러의 대서양 방벽을 짓는 것을 도운 사람은 방면되고 대서양 방벽을 좋은 생각이라고 했던 사람은 감옥에 들어간다.” 나치 독일에 협력한 기업인들은 풀려나는 마당에 나치에 협력한 문필가, 예술가들에게는 극형이 선고되는 당대 현실을 비꼰 이면에는, ‘물질’보다는 ‘정신’이 더욱 중요시된다는 사실도 자리잡고 있다.

똑같은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일반 필부가 한 말과 소위 예술가들이라는 공인이 한 말과는 그 무게에 차이가 있다. 하물며 ‘정신의 스승’이라는 시인과 시대의 아름다움을 개척해나가는 화가의 말과 그림에 있어서 그 선전 효과는 거대하다고 하겠다. 천부의 재능인 ‘혀’와 ‘붓’에 책임을 지지 못할 것 같았으면 아예 사용을 하지 말 것이며, 사용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졌어야 될 일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시를 읊는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는 두 종류의 용어가 있으니 ‘환쟁이’와 ‘화가’, 그리고 ‘재담꾼’과 시인이 그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면 화가와 시인으로, 즉 예술가로서 존경을 받지만 책임을 지지 못할 것 같으면 ‘쟁이와 꾼’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해방 정국 이후, 예전의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 나가던가 신념이 잘못된 줄 알았으면 철저한 자기 반성과 뉘우침 후에 새로이 출발을 해야 될 것이었다. 일제의 흉폭성이 극에 달하던 시점에 거기에 철저히 순응했다가, 일제 패망 후에는 자신들의 재능이 어떻게 팔려나갈지는 신경쓰지도 않은채, 어쩔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 놓는 것은 한국의 시단, 화단을 이끌어온 두 거봉으로서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가? 그들은 일제 하에서 정치적 행위를 했으니 ‘예술만을 위한 예술(唯美主義)’로서의 면죄부도 받을 자격이 없고, 하물며 ‘도덕성이 없는 예술이 무슨 예술인가?’라는 톨스토이의 물음 앞에도 숨을 곳이 없다. 이들 둘의 죽음을 바라보자니, 나치 패망후, “당신들은 레지스탕스의 프라이드에 충실하라. 나는 파시스트의 프라이드에 끝까지 충실하겠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권총 자살한 프랑스 소설가 드리외 라 로셀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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