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평론가]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Kreisleriana) - 호로비츠
[나도 평론가]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Kreisleriana) - 호로비츠
  • 전재형 / 물리 석사과정
  • 승인 2001.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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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가 아름다운 ‘골드베르크(Goldberg) 변주곡’을, 베토벤이 불멸의 ‘디아벨리(Diabelli) 변주곡’을 작곡했다면 슈만은 신비스러운 ‘크라이슬레리아나(Kreisleriana)’를 남겼다. 변주곡 스타일의 8개의 악장들로 이루어졌으며 총 연주시간이 30분이나 되는 이 곡은 호프만의 소설 속의 주인공, 악장 크라이슬러의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얻어 작곡됐다고 한다. 단 나흘만에(!) 완성된 이 신비하면서도 열정적인 명곡에 대해 슈만은 그의 연인 클라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A positively wild love is in some of the movements. ‘

작품은 기원에서부터 묘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곡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환상적이며 아름답다. 대략적으로 격정적이며 신비스러운 악상과 고요하며 사색적인 악상이 한번씩 번갈아 가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도입부는 연속적인 셋잇단음표를 사용함으로써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거세게 시작된다. 다음 악장에서 분위기는 돌연 급변해서 애틋하면서도 환상적인 적막감이 흐르는데 이내 곡은 열정에 휩싸이게 된다. 다시 안정을 되찾으면서 곡은 세 번째 악장으로 넘어가고 이쯤 되면 곡은 어딘지 모르는 미궁 속에 빠져든 듯 신비함으로 가득 휩싸인다. 개인적으로 난 이 곡이야말로 슈만의 난해한 정신세계(곧 음악세계)를 극명히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슈만의 여타 작품들도 충분히 즐기고 감상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들일 것이다.

특히 이 곡을 비롯한 슈만의 작품들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수준을 가늠해줄 수 있는 좋은 레퍼토리로 여겨져 온 듯 싶다. 왜냐하면 당대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 불린 사람치고 슈만을 레퍼토리로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루빈스타인, 호로비츠, 코르토, 리히터, 브렌델, 폴리니, 아르헤리치에서부터 요사이는 키신까지 정평이 나있는 연주가라면 꼭 올라가봐야 할 산으로 여겨졌다. 다만 쇼팽만큼 대중적이지 않은 이유는 슈만은 기교적으로 상당히 난해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악상이라든지 리듬, 멜로디 등이 쉽게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호로비츠는 생전에 슈만의 곡을 좋아해 자주 연주하곤 했었는데 크라이슬레리아나의 경우 여러 장의 음반을 남겼다.[DG1985, CBS-SONY(1962-1973)masterworks등] 이 곡만 가지고도 호로비츠는 당대의 다른 저명한 피아니스트들을 하찮은 존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소개하자면, 호로비츠는 시대와 장르를 막론하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교를 소유한 피아니스트이다. 자신을 리스트(Liszt)에 비교하는 것조차 불평했던 라흐마니노프가 그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있어서 자신을 능가하는 피아니스트로 인정한 사람이 바로 호로비츠다. 그에게는 다른 연주가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너무나 영롱한 피아노 톤, 들릴까말까 할 정도로 작은 음량에서부터 천둥과 같은 폭발적인 음량까지 큰 폭의 음량, 섬뜩할 정도로 현란한 패시지에서의 정확성 등등.

여러 번의 은퇴와 복귀를 통해 항상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블라드미르 호로비츠. 82세라는 고령에 그는 다시 한번 이 곡을 녹음하고야 말았다 [DG,1985]. 음반을 통해 보여준 말년의 피아니즘은 한마디로 서정성의 극치였다. 악마적인 기교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그렇다고 그의 테크닉이 떨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뜻하며 영롱한 빛깔만이 부드럽게 곡을 감싸고 있다. 그 복잡 난해한 크라이슬레리아나가 -자살한 슈만의 영혼과 같은- 호로비츠의 부드러운 터치로 위로받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통상적인 연주 속도보다 약간 느린 연주이며 곡의 어느 곳에서도 미친듯한 격렬함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여유로움 속에서 다른 연주자들이 찾아내지 못했던 곡의 숨은 부분들을 하나씩 끄집어 낸다. 그의 손에 의해 비춰지는 곡의 모습은 마치 인상주의 그림처럼 보여야 하는 것들만이 영롱하게 드러난다.

슈만의 혼,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이 좌절된 슬픈 작곡가의 울부짖음을 피아니스트의 신, ‘호로비츠’가 죽기 전에 달래주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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