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엿보기 -TV속의 역사] 한국사의 독안룡(獨眼龍), 궁예
[문화 엿보기 -TV속의 역사] 한국사의 독안룡(獨眼龍), 궁예
  • 박정준 기자
  • 승인 2001.05.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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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던 적이 있었다. 한번은 집에서 밥을 먹다가 부모님께서 “허준 같은 큰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는 통에 먹다 체할 뻔 했던 기억이 난다. TV의 역사 드라마라는 것이 ‘역사’이기 이전에 ‘드라마’이다 보니 고증보다는 시청률에 더 중점을 둔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떻게 역사에 사료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는 인물의 생애를 그토록 왜곡시킬 수가 있는지 의아했었다. 실제 스승이었고 허준의 생애에 많은 도움을 준 은사인 양예수를 적수로 묘사하고 200년이나 후세의 인물인 유의태를 스승으로 등장시킨 것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차피 역사에 남겨진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인물을 재창조해내는 과정을 구경하는 것도 역사 드라마를 보는 한 즐거움이긴 하다.

중국, 일본, 한국의 역사에는 각기 애꾸 영웅(獨眼龍)이 등장하여 흥미를 끈다. 당(唐) 말기에 이름을 떨친 이극용, 일본 전국 말기 에도 막부 성립의 감시자이자 든든한 배후였던 다테 마사무네(伊達正宗), 그리고 우리 역사의 궁예가 그들이다. 외눈으로 두눈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것을 본다고 호언하던 이들은 동시에 운명의 여신에게 버림받아 야심을 이루지 못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궁예의 경우는 한 시대를 호령했던 호걸치고는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나마 남아 있는 사료도 그를 적대시하는 고려시대의 사료가 대부분이다. 오로지 승자의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만이 정사(正史)로서 남고 패자의 입장을 두둔하는 자료는 거의 남지 않는 것이 우리 역사의 폐해가 아닐까? 중종과 인조의 입장에서 바라본 ‘역성혁명’이 남아 있을 뿐, 연산군과 광해군의 입장에서 본 ‘쿠데타’로서의 역사는 남아 있지 않다. 반면 가까운 중국과 일본의 경우를 보면, 위진이 성립되어도 유비, 관우, 장비의 전설은 남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설립한 후에도 사나다 유키무라의 무용담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제작진은 ‘태조왕건’이란 드라마를 각색하며 역사책에서 단 한 줄의 문장, 단 한 단어로 설명되는 많은 인물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은부와 종간 같은 이들은 궁예 패배후, 가장 먼저 처형된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드라마에서 비중있는 존재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매니아 입장에서 안타까운 점은 인물들의 설정들이 너무 전형적이라는 점이다. 사료가 부족하다보니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그리고 현시대 상황에서 모델을 따와서 갖다 붙일 수 밖에 없었겠지만, ‘화공으로 대승을 거두고…’라는 역사책의 문장이 ‘동남풍을 불러…’식으로 삼국지의 적벽대전의 재탕으로 이어지는 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더욱이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던 궁예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사의 편견을 뚫고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데는 노력했지만, 권력 획득, 권력에의 도취, 주색잡기 속에 광포화, 지지기반 이탈, 부하의 배신이란 도식은 모대통령을 보는 듯 해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만년에 주색잡기로 총기를 흐트러뜨리는 궁예의 모습이 사실이라면, 궁예의 흠을 잡기에 골몰해 있던 정사(正史)에서 놓쳤을 리가 없지 않은가? 드라마에선 부하들이 전부 등을 돌리는 것으로 나오나 정사(正史)에서조차, 왕건의 정권 성립 이후에도 친궁예 세력의 끊임없는 모반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궁예의 패망 이후에도 그에게 심복하는 무리가 다수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궁예가 미륵불로 자처하고 말년에 공포 정치를 단행한 것이 그의 정신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그가 당시에 처한 입장을 보면 반박이 가능하다. 당시의 불교적 세계관 속에 제왕들은 하나같이 부처를 자처했다. 진흥왕은 전륜성왕을 자처했으며 신라의 성골들은 자신들의 혈통이 석가의 후손임을 내세웠다. 그리고 궁예가 역사속에서 떠맡았던 역할은 호족의 발호로 어지러운 신라 하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중앙집권제의 제시였다.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방 호족, 귀족들을 억누르고 중앙 집권을 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가장 널리 이용되어 온 것이 공포정치와 하층민의 중용(궁예의 경우는 사민평등)이다. 국정을 전횡하던 귀족(보야르)을 억누르고 근대 러시아의 기초를 다진 이반 3세도 ‘雷帝’라는 별명속에 귀족들을 두려움 속에 떨게 했었고, 일본 전국 시대의 혼란상을 잠재운 오다 노부나가도 그 흉폭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궁예의 경우는 자신의 중앙 집권적 혁명의 적인 지방 호족들이 동시에 자신의 세력기반이라는 모순 속에 빠져 있었고 이를 대신할 지지기반으로 부상했어야 되었을 하층민, 청주인들의 성장이 충분히 따라와 주지 못했으며 또 하나의 지지기반이 되었어야 할 승려들과 미륵신앙 상의 교리 차이로 문제로 충돌한 이상(석총의 예), 미치지 않았어도 그 몰락은 예정되어 있지 았았을까? 하긴 드라마에 나온대로 광기속에 패망해가는 군주의 모습이 보다 극적일지는 모르겠다. 역사는 인기가 없어도 역사 드라마나 소설이 인기가 있는 것은 그 속에 극적 요소가 양념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 사이를 넘나드는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이를 받아드리기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어내고 고민하는 진지한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