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거장, 그 창조의 숨결 ① 윤이상
[문화기획] 거장, 그 창조의 숨결 ① 윤이상
  • 노동은 교수 / 중앙대학교 한국음악연구소 소장
  • 승인 2003.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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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흐르는 세계통합의 위대한 울림

우리들의 가슴 속에 ‘인간’과 ‘예술’과 ‘조국’이라는 글자를 살려놓은 윤이상. 그 이름 석 자가 이처럼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윤이상의 삶과 죽음은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며, 그의 좌절과 희망은 우리의 좌절이자 희망 아닌가? 그는 또한 우리들의 꿈을 실현시켜준 음악가였다. ‘통일음악회’(1990)를 성사시킴으로써 분단 45년만에 처음으로 우리 민족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한 당사자가 그이였다. 그래서 우리가 무서워하고 찢기운 이름인 ‘판문점’과 ‘38선’의 이데올로기를 녹여버리고 ‘분단과 민족과 한반도와 세계’를 통일로 이룩한 윤이상이었다.

1967년 소위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으로 무기징역-15년형-10년형-석방이라는 긴 시련을 겪으며 추운 감방 안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류퉁의 꿈> 등을 작곡한 그 장인정신과 불굴의 정신에서 우리들 저마다에 감추어진 그 인간과 예술성을 다시 일깨워준 음악가이다. ‘음악을 통하여 세계통합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동서양의 음악세계를 유일하게 종합’한 큰 음악가였다. 그러나, 그가 끝내 고향 통영에 돌아오지 못하고 1995년 이역만리 베를린에 묻힐 때까지 고향의 흙과 돌을 만지며 통한의 아픔 속에서 삶을 마감함으로써 우리 또한 고향이 부모이자 조국이고 영혼이자 예술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일깨운 그이였다.

큰 음악가. 윤이상의 발자취

윤이상은 1917년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리에서 태어난 윤이상은 부친의 본가가 통영 도천동 157번지이었기 때문에 통영출신이 되었다. 특히 윤이상의 외할아버지는 산청에서 동학농민항쟁에 앞서다가 체포되어 고문 끝에 폐인이 된 상태였다.

윤이상은 통영에서 호상서재와 통영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보통학교 학적부에 “창가에서 특출한 수재로 두뇌가 뛰어난 어린이”로 평가받을 정도이고 보면 그는 성적이 우수하고 음악재능이 뛰어나 스무살이 되던 해인 1937년에 첫 동요집을 냈다. 일본 동경에서 작곡공부와 반일지하운동을 병행하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귀국한 윤이상은 비밀 독립운동으로 무기제조를 하다가 거제도 장승포경찰서로 체포되어 통영으로 이송되었다. 구금이 풀린 이후 주거 제한령을 탈출하여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 경남 통영과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는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주간 <소년 태양>의 편집국장직도 맡았다. 부산고등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1953년에 서울로 이주한 그는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에 출강하여 작곡전공을 지도하거나 작품과 평론을 발표하는 등 악단을 주도하였다. 1956년 4월에 그는 작품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제5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윤이상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6년 6월 그의 나이 40세이자 전 생애의 반평생을 보낸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 ‘파리음악원’으로 유학하였다. 1957년 8월 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옮겨 1959년 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후로 현대음악제에 참가하거나 여러 작품활동을 하였다. 1966년은 그에게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다 준 해였다. 희망은 그의 작품 <예악>이 독일 도나우에싱겐에서 발표되어 확고한 거인으로 부각된데서 비롯하였고, 좌절은 이 해 한국중앙정보부원들에게 서울로 납치되어 동베를린공작단사건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교도소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완성하고 <율>과 <영상>작품을 탈고하였다. 1969년 2월말 그의 세계적인 동료 작곡가겚낵?음악가들과 독일정부의 협력으로 석방되어 독일에 돌아온 그는 오페라 <류퉁의 꿈>과 <나비의 미망인>이 초연되고, 이어서 하노버음악대학의 작곡강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1972년에 베를린음악대학 명예교수가 된 그는 뮌헨올림픽대회 문화행사 일환으로 오페라 작곡위촉을 받고 <심청>을 발표하였으며, 1977년부터는 베를린예술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그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5.8 쾰른)하였다. 1985년에 독일 튀빙겐 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 1987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았으며 이 해에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발표하였다.

이미 윤이상은 1988년 7월부터 ‘민족합동음악축전’을 남북한 정부에 제의한데 이어 1990년에 남북한 각각 현지나 판문점에서 민족통일음악회 개최를 제의하였다. 1990년 윤이상이 제안한 역사적인 통일음악회가 분단 45년 만에 개최되었다. 먼저 10월 14일부터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 판문점을 거쳐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하고, 같은 해 12월 8일 서울에서 개최한 ‘90 송년통일전통음악회’에 북한의 ‘평양민족음악단’이 참가하여 화해의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윤이상이 78세가 되던 1995년 5월 동경에서 윤이상의 참석하에 교향시 <화염 속에 쌓인 천사>가 초연되었고, 독일방송이 20세기 저명작곡가 30인 중의 한사람으로 선정하였다. 이 선정은 동양인으로 처음이었다. 같은 해 11월 지병인 폐렴으로 베를린 자택에서 이승의 삶을 마감하였다. 윤이상 사후 3년째인 1998년 평양에서 ‘윤이상통일음악회’가 개최되었다.

그가 있어 가능했던 남북, 동서양의 거룩한 만남

윤이상의 발자취는 그 자체가 두 개의 큰 세계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그가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1917년부터 1995년까지 이 시기가 일본제국주의 시기이자 냉전의 시대였다는 세계사적인 현대사의 세계였다는 것. 또 하나의 세계는 그가 한국문화와 서양문화 속에서 각각 반평생을 살며 자취를 남기고 이를 음악으로 재통합시켜 세계현대음악에 통합의 장을 열고 세계사적으로 살아간 그 예술의 세계라는 것이다.

전자에서 우리들은 윤이상이 인간과 민족으로서 언제나 민주와 독재, 민족과 타자와의 대화, 전쟁과 평화, 이데올로기와 자유 사이에서 끊임없이 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해간 자유인 윤이상을 만난다. 이 전자에서 윤이상이 민족음악가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 하 항일운동으로 체포와 구금 속에서 고통을 받은 그는 누구 못지않게 민족현실을 아파했으며, 동베를린 사건의 굴욕을 극복하면서 인간존엄성의 고귀함을 깨달았다. 또, 자신이야말로 냉전이데올로기와 남북대결의 희생자임을 깨닫고 세계문제를 껴안아 평화를 모색한 큰 음악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민족ㆍ통일ㆍ독재ㆍ항거ㆍ민주화ㆍ반핵ㆍ평화 등을 주된 내용으로 삼은 것이 많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후자에서 그는 생애의 전반생을 한국에서, 후반생을 서양에서 살았다. 그의 창작 아이디어는 한국(동아시아를 포함), 그 고향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의 음향적 조직화는 서양의 현대기법으로 삼았다. 바로 이 점이 동양과 서양을 음악으로 통합시킨 전세계의 가교가 된 셈이다. 고향 통영을 비롯하여 조국의 음악적 전통이야말로 그의 창작의 샘이었다. 그는 그 안의 독창적인 기(氣)의 흐름을 선율화시킨 동양음악의 전통과 태극으로서 음양체계를 독창적인 논리에 바탕을 두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서양의 현대음악기법이라는 옷을 입힘으로써 독자적인 ‘윤이상음악’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울림, 그 음향의 한 음향 음향은 윤이상음악의 독창성의 결과이다. 또, 그는 벽에 부딪친 세계 현대음악계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를 ‘음악을 통한 세계통합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음악가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이상은 동서양의 문화가 같은 지평에서 만날 수 있다는, 그럼으로써 동서양이 하나의 세계가 되어 인류의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서구적인 오리엔탈리즘이 윤이상에겐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윤이상. 그는 우리에게 조국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남쪽과 북쪽, 동양과 서양의 평화롭고 거룩한 만남을 예술에서 성취시킨 인간이자 음악가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그 인간과 세계의 의식이 바로 세계사적 창조의 바탕임을 일깨워준 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