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돌 한글날에 쓴 국어 생활 진단서
556돌 한글날에 쓴 국어 생활 진단서
  • 이대로 / 우리말 살리는 겨례모임 공동대표
  • 승인 2002.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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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독립은 못 이룰 꿈인가

556돌 한글날을 맞이해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 한글을 가진 한국인들의 말글살이 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리한 글자를 만들고서도 그 주인들은 500여 년 간 잘 쓰지 않고 배우고 쓰기 힘든 남의 글자, 한문만 숭상했다. 그런 가운데 불행 중 다행일까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우리 말글의 중요함과 훌륭함을 깨달은 선각자들이 우리 말글을 갈고 닦고 지켜서 해방 뒤 우리 말글만으로 말글살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글이 태어난 지 500여 년 만에 한글이 나라글자로 인정받아 우리 말글로 공문서도 쓰고, 교과서도 만들었다. 수천년 동안 짊어진 한문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우리 국어독립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참으로 놀랍고 새역사 창조를 위한 큰 사건이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국민이 많아서 가난하고 미개한 나라란 소리를 듣던 우리가 모든 국민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밝은 세상이 되어 민주 국민, 문화 국가라고 큰소리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수 천년 길들여진 한문 생활습관과 그 문화는 우리 말글만 쓰는 국어생활을 끈질기게 반대하고 방해했다. 조선시대처럼 한문 전용은 아니지만 일제시대처럼 한자혼용하자고 해서 많은 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 신문과 대학 교과서와 이른바 전문서적에서 일제 식 한문 섞어쓰기를 고집한 것이다. 일제 교육으로 일본식 한자혼용 말글살이에 길든 지배층,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한글전용 정책과 교육을 방해한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 겨레가 삼국시대부터 수 천년 꿈꾸던 국어독립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세계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면서 미국말 태풍이 불었고, 한문이 지배하던 그 자리를 미국말이 차지하려 하고 있다. 이른바 영어라고 불리는 미국말 열병이 우리 말글 독립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려하고 있다. 이 병은 김영삼 정권 때 세계화 구호아래 영어조기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생긴 병인데 이제 치료하기 힘들 정도로 중병이 되었다.

한문이 ‘주둔’한 자리엔 다시 미국말글이

그 증세를 보면 미국말 공부로 어린이 들볶기, 미국말글로 이름을 바꾸거나 이름짓기, 미국말 공부에 많은 돈과 힘을 바치기, 어른들은 미국말 강박감 증세로 시달리기, 제나라 말글 교육은 제대로 안 하기, 제 말 천대하고 버리기, 미국말 공용어로 하기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영어 공용어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한문 전용과 같은 강대국 숭배 사대주의 병인데 그 병이 치료된 줄 알았는데 다시 재발하고 있다.
이 병은 우리 말을 더럽히고 짓밟아 죽게 해서 우리 겨레얼과 배달겨레 자체까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다. 쓸만한 상품은 거의 모두 미국말글로 이름짓고, 회사이름도 미국말글로 바꾸고, 좀 배웠다는 지식인이나 교수들은 미국말을 섞지 않으면 대화나 강의를 제대로 못한다. 며칠 전 중학교 국어교과서가 엉터리라는 보도가 있었듯이 국어 교육은 뒷전이다. 영어 공용어를 시행하는 회사가 점점 늘어난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말이 사라지고 있는데 대통령 할아버지와 대학총장 아저씨로부터 어린이와 시골 아줌마까지 영어 걱정만 하고 있다.

나는 영어 조기교육을 전국 초등학교에서 똑같이 시행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교육 낭비요 우리말글을 병들고 죽게 해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으로 보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나는 영어 공용어 주장이 나왔을 때 그 것은 우리말과 겨레를 죽일 암세포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암세포가 처음 생겼을 초기엔 몸살 정도로 나타나기 때문일까? 다른 이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을 국수주의자니 우물 안의 개구리 같다느니 비난만 하고 있었다.

말글은 지식과 정보를 담는 그릇이며, 전달하는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그 말, 그 도구를 얻는데 돈과 힘을 다 바치면 언제 무슨 힘으로 진짜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활용해 새 문화와 문명을 창조하고 훈련한단 말인가. 전문가가 아니면 우리말글로 지식을 전하고 받는 것이 편리하고 경제성이 있다. 막상 외국말을 잘 해야 할 교수나 외교 담당자, 무역업자는 제대로 못해 피해를 보고 쩔쩔맨다는 보도를 가끔 본다. 그러면서 거리 청소할 사람까지 외국어 걱정과 강박감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미국말을 배우지도 말고 무조건 쓰지말자는 것이 아니다. 배우더라도 미국의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배워서 더 발전시키거나 일반 국민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전문가나, 외국인과 경제 활동을 하기 위한 유능한 책임자를 키우기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좋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일생동안 별로 쓸 일이 없는 사람이나 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강요하지 말자. 외국인과 이야기하고 미국책이나 인터넷을 검색해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기위해서가 아니라 국내인끼리 말할 때 미국말 섞어 쓰고 외국인과는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영어 교육은 안된다.

요즘 거리에 보면 미국말글 간판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다. 세계화한다고 선경이 SK, 럭키 금성이 LG로 이름을 바꾸면서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올해 우리나라 대표 공기업인 한국통신이 KT로, 포항제철이 POSCO로 바꾸었다. 신문과 방송은 말할 것 없고, 나라안 곳곳에 간판과 우편물에서까지 광고함으로써 우리말 버리고 미국말 퍼뜨리기 입체 작전을 하고 있다. 국민은행도 저들이 부러웠던지 KB란 간판을 달기 위해 수백억원을 들인단다.
이들의 영문 이름짓기는 수준 이하다 영문 첫 자만 짜깁기한 것으로 뜻도 없고 말도 되지 않는다. 한글로 바꾸면 에스케이는 ‘ㅇ ㅋ’ 엘지는 ‘ ㅇ ㅈ’으로 이름짓는 식이다. 전엔 통신상에서 “반가워요”를 “방가요”식으로 애교있게 줄이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아해ㅎ해ㅎ’처럼 무슨 뜻인지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는 암호가 유행하고 있다. 말은 통해야 하고, 새말을 만들어도 국어 체계나 말법을 벗어나거나 파괴해선 좋지 않다.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고 모르는 이에게 피해를 준다.

우리말 죽이기 바람을 어떻게 막을것인가

말은 누구나 잘 알아듣고 통해야 한다. 말이 통해야 마음이 통하고 서로 사랑도 하고 화합도 하고 지식 정보 전달이 쉬워서 튼튼한 사회가 된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지나친 미국말 숭배와, 문란한 국어생활을 해서는 모두 잘 살기 힘들다. 더욱이 남북 통일을 앞둔 마당에 더욱 그러하다. 얼마전 신문기사에 따르면 북의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 김대통령의 말을 80%밖에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영어 섞어쓰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남쪽에서도 교수들이 하는 말글을 일반인들은 잘못 알아듣는 수도 있다. 영문간판을 단 가게 주인이 그 간판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장사하는 것을 확인한 적도 있다. 이런 말글살이로는 지식 정보 강국도 힘들고 통일도 어려워진다.

우리 국민들이 이 만큼 똑똑해지고 나라가 발전한 것도 한글날과 한글 덕이라고 본다. 한글날이 없었으면 한글이 나라글자로 자리잡을 수 없었고 국민 지식수준이 이렇게 빨리 높아질 수 없었다.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면서 한글 천대와 우리말 죽이기 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 우리 말글이 위기를 맞았다. 이제 이 위기를 넘기고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계기를 삼기 위해서도 한글날을 문화 국경일로 제정해 월드컵 경기 때 보여준 것처럼 온 국민이 모여 문화 잔치를 벌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글날이 문화 국경일이 될 때 우리 국어독립의 꿈은 이루어지고 문화강국으로 직행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제안하는 영어암 치료를 위한 한 처방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