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가장한 왜곡과 기만
사랑을 가장한 왜곡과 기만
  • 최재명 / 생명 02
  • 승인 2002.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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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이라는 영화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아시스이다. 이것은 작가가 무엇인가를 항변하고자 할 때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효과적이어서, 작가가 보여주는 가상의 현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 자체를 치환해 버릴 수 있다. 즉, 영화 속 인물들의 상황과 선택 하나하나는 우리 시대를 표상 하는 행동의 기호로 인식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들과 인물들의 행위를 선택함에 있어서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의 이른바 작품성 있다는 영화들 - ‘나쁜 남자’나 ‘오아시스’등 - 은 그러한 신중함에 있어서 미흡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이러한 영화들에서 많은 다른 장점들을 찾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상을 그리는 가운데의 몇몇 사건들에 은밀한 상징을 대입하는 이러한 방식에 있어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 전체의 의미를 이끌어 가는 몇몇 사건들이라고 하겠고, 이 부분의 완성도가 즉 영화의 완성도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종두와 공주의 처음 만남은 어디일까? 비둘기가 날아다니던, 이사로 부산했던 집? 어디선가 지갑에서 슬쩍했을법한 돈으로 마련한 꽃다발이 놓여 있던 집? 아니다. 그가 그녀를 강간했던 집이다. 강간을 통해 그녀는 그녀 자신의 값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그녀가 하나의 인간이 되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신체적으로 강간하려 했다. 그가 그녀를 정신적으로 강간했다. 고의이건 아니건, 강간은 강간이다. 무엇이 다른가? 법 조항 상의 형기? 그래, 그깟 제도의 도덕이 그렇게 중요한가? 강간은 강간이다. 그 후로 무엇이 일어나고 마는가. 종두의 강간은 그녀의 집에서 벌어지는 이웃집 부부의 정사와 중첩되며 흐려져 버린다. 강간의 부정적 이미지는 부부의 대낮 정사의 낄낄거림으로 미화된다.

왜 작가는 종두의 강간이라는 행위를 비극이 아닌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환하며, 얼버무리고, 그가 용서받도록 만들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창동 감독에게는 강간이 순수함의 지고하신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강간을 통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강간은 종두의 순수함이다. 그녀는 강간 이후에 그를 용서했기 때문에 강간은 인간됨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아! 보는 이에 따라 거룩한 순수함일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했다. 리얼리즘의 상징이란 신중히 선택되어야 한다고. 강간은 분명 신중한 선택은 아니다. 왜 우리의 현실은 강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가? 왜 우리는 그의 작위적 슬픈 현실을 삼켜내야만 하나? 당신의 장애인 여동생이 인간이 되기 위해 강간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구나. 여자가 여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인간이란 몸뚱이만 지닌 존재가 아니다. 몸뚱이만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들의 정신세계는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는가?

‘베티블루’를 보았다. 야한가? 처음부터 섹스라서? 그것도 롱테이크라서? 이 아름다운 첫 장면은 ‘오아시스’의 그 고귀하신 순수함과는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하다. 베티와 조르그의 정사는 동물적인 욕구의 발현이 아니라 그들 사랑의 춤과도 같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 뒤에는 주체할 수 없는 작가의 창작열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세계를 온통 파랗게 물들이는 거대한 그 무언가이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두 주인공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상처받은 짐승들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순수하다. 그러나 원시적으로 순수하다. 그들에게는 승화될 무엇이 없으므로, 동물적이며 싸구려이다. 마치 크리스탈인양 깎아놓은 플라스틱 컵 같다. 현실의 인간은 다 그렇다고? 그렇지 않다. 상처받은 인간에게는 혼이 없어야 하는가? 동물적 행위로만 치유될 수 있는가?

종두의 모난 모서리 하나하나는 정상적인 사회의 질서와 칼날처럼 대립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극을 달한다. (이번에는) 순수하다고 해도 좋을 그들의 정사는 결정체를 이루기도 전에 주변의 매서운 눈초리에 녹아 없어져 버린다. 아니 녹아버린 액체조차도 타버린다. 극장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어떻게, 어떻게.’라는 탄성은 이 장면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를 대변한다. 그런데, 얼마나 기막힌 기만인가!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과 감독의 시선은 놀랍도록 닮은 것이다. 감독 또한 그들이 그저 그대로 살아가도록 원치 않는 것이다. 종두는 갑자기 카센터에서 기술을 배운다, 공주는 그 불편한 몸을 일으켜 방안을 청소한다….

아무리 리얼리즘의 영화라 하더라도 일상의 모든 행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들 장면이 선택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과연 그들은 사랑의 힘으로 삶의 의지를 얻는 중인가? 이들 장면은 그것의 상징인가? 그렇지 않다. ‘한 컷’ 동안 일을 배우는 종두에게 그것은 그들의 사랑에서 얻은 강력한 의지로의 행위가 아니다. 행위의 일회성이 즉 증거이므로. 웃긴다. 그저 정상인의 사회에 편입되려는 눈물겨운 손짓이 아닌가. 그들 손에 들려있는 정비 공구와 빗자루는 그들 나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푸라기’가 아닌가. 애써 눈물겹게 망가진 인간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 고쳐보려고 하는 감독의 모습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주변인들의 모습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회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감독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영화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는 것임을 진정 모르는 것일까.

한술 더 떠서, 소시민의 감수성과 감독이 창조한 ‘오아시스?의 감수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감독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일반적인 인간이 강간범을 보고, “오 순수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으니 소시민의 감수성인 것이고, 강간을 순수의 상징으로 떠받들었으니 좀 특별난 ‘오아시스’의 감수성이라고 하겠다. 하여튼, 종두의 전과 경력을 훑어보자 : 폭행, 강간미수, 그리고 뺑소니. 이 뺑소니라는 항목은 도대체 뭔가? 종두와 공주의 비극적 만남의 포석? 아니다. 그런 인연이라면 다른 전과로도 충분히 꾸민다. 종두라는 인물이 얼마나 착하고 순수한가를 과시하기 위해서 뺑소니라는 덕목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의 순수함을 떨쳐 울려야 하는 이유는? 감독의 소시민적 감수성은 폭행과 강간미수만의 ‘순수한’ 종두라는 캐릭터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대범하고 용렬하기 그지없는 ‘오아시스적’감수성은 여기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사랑의 리얼리즘적인 왜곡과 기만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이 황금 종려상을 받아도, 왜곡은 왜곡이고 기만은 기만인 것이다. 서양의 상징과 우리의 상징은 엄연히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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