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오름돌] 시대유감
[78 오름돌] 시대유감
  • 이길호 기자
  • 승인 2008.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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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총학생회에서 매달 ‘선배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주최한다.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우리대학 졸업생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조언을 듣는 프로그램이이다. 그리고 이번 달에 초청된 졸업생은 ‘치과의사’이다.

‘포스텍은 우리나라와 인류사회 발전에 절실히 필요한 과학과 기술의 심오한 이론과 광범위한 응용방법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소수의 영재를 모아 질 높은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지식과 지성을 겸비한 국제적 수준의 고급인재를 양성함과 아울러 산학연 협동의 구체적인 실현을 통하여 연구결과를 사회에 전파함으로써 국가와 인류에 봉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우리대학의 건학이념 중 한 부분이다. 물론 우리대학의 모든 학생이 이 건학이념에 입각해 입학한 것은 아닐 것이다. 기자 또한 과거 수험생 시절에는 의대에 관심이 있었지만 우리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좌우지간 여러 가지 사연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우리대학은 재학기간 동안 이러한 건학이념에 충실한 교육과 서비스를 제공해 학생들에게 과학기술 연구와 발전에 대한 사명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미래의 노벨상을 꿈꾸고 있어야할 우리대학 생명과학과 학생들은 대다수가 의학전문대학원(이하 의전원)을 희망하고 있고, 총학생회는 이와 같은 학생들의 수요를 고려해 ‘치과의사’ 졸업생을 초청해 의전원 진학 관련 강연을 열고 있다. 또한 재작년 수석졸업생은 국내 명문 의전원으로 진학했다. 당시 기자는 입학하기 전이었으나, 포스텍 수석졸업생이 의전원으로 진학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었다. 아무리 언론에서 이공계가 위기라고 해도 적어도 ‘포스텍’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나라 최고의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이라고 꼽히는 우리대학 학생들조차 의전원으로 몰리게 된 것일까? 의전원은 과연 본래 그 취지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일까?

본래 의전원은 우수인재의 이공계 기피 현상을 타파하고자 만들어진 체제이다. 하지만 의전원 입학생의 대부분이 이공계 학부 출신 이라는 점은 의학부 대신 의전원 체제로 돌린 정부의 선택이 멋들어지게 빗나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년 교육과학기술부(당시 교육부)가 국회 교육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의·치학전문대학원생의 출신 전공 중 이공계 전공자 비중이 거의 90%로, 사실상 재학생의 대다수가 이공계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졸업 후 의전원을 생각하는 학생 중 순수 기초의학 연구를 통해 국가와 인류에 봉사할 목적을 가진 학생도 몇몇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대한 등록금과 사회진출 시기가 기존 의대체제보다 2년 이상 늦춰지는 문제 등으로 인하여 의전원으로 진학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임상의를 목표로 하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경북대의 110명 의전원 학생 중 단 15%만이 기초의를 준비하고, 나머지는 다 임상의의 길을 걷겠다고 말했다. 대부분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고소득 가능성이 높은 임상의의 길을 걷고, 그들 대부분이 개원의가 되는 현실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의전원 체제가 이를 가속화할 것은 분명하다. 결국 기초의학의 발전은 점차 더뎌질 것이고, 이는 의학 전체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인문학·사회학·법학 등 다양한 전공 출신의 의료인재 양성과 우수인재의 이공계 기피 현상 타파라는 정부의 의전원 도입 목적은 완벽하게 틀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수한 인재의 이공계 선택이 기초학문 연구로 이어지지 않고 의전원 입학의 준비단계가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공계 기피 현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셈이고,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이공계를 살려야 한다는 얘기는 수없이 나왔고, 정부 차원에서 이공계 살리기 정책을 들고 나온 지도 6년이 지났지만 아직 성과는 기대 이하인 셈이다. 의전원 제도는 미국 등 선진국가의 제도를 들여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를 보아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 어울리는 옷은 분명히 아니다. 무턱대고 문부터 열고 학생부터 들이고 보자는 식은 이제 곤란하다. 이제는 국가에서 이공계 출신에게도 정말 제대로 된 밝고 안정적인 미래의 길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현 시대는 그러기엔 너무 길이 아득해 보인다. 2008년, 시대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