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뷰] 키취문화
[문화리뷰] 키취문화
  • 문재석 기자
  • 승인 2002.05.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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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디와 강한 사회적 메시지로 한국의 키취문화를 바꾸어 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딴지일보'
키취란 단어는 원래 1860년대의 독일 화상에 의해 특정 종류의 미술품을 가리키는 속어에서부터 발생했다. 이후 고결함과 성실함이 결여되어 있는 미술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됨에 따라, 그 쓰임도 점차 커져서 다른 어떤 예술 관련용어보다도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키취 문화라 함은 그러한 키취 미술에서 확대되어, 문화 전반에 관한 현상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예술의 독창성 혹은 유일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키취 문화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애초에 복제판을 사는 의미가 경제적인 이유로 원본을 사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의 키취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현대 사회가 대량생산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원판과 복사판 사이의 경계는 애매모호해졌고 이를 이용해서 문화의 대량소비를 꾀함으로 이윤을 남기자는 것이 키취의 단순하고 명료한 그리고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논리인 것이다. 물론 이를 천박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키취는 원판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량생산품을 독특하게 변형한 패러디나 오마쥬 또한 생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기도 한다. 즉, 진실과 거짓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구분을 굳이 경계 지으려고 하지 않고 그 자체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더 건강한 예술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바로 키취이다.

키취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빼놓을 수 없다. 뉴욕거리를 활보했던 앤디 워홀과 같은 현대 미술가는 다분히 키취적이고 실크스크린을 이용한 ‘복제’ 예술가였다. 앤디 워홀은 키취가 기존 예술이 가지는 엘리트적 편협함에서 나올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실크스크린을 통해 단지 찍어내기만 하는 그였지만, 후기에 바스키아와 함께한 작품들은 복제보다는 변형 그리고 패러디라는 키취의 조금 더 발전된 형태를 보여주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의 키취는 생각보다 접하기 쉬운 곳에 자리한다. 넓은 범주에 넣자면 이발소 뒤에 걸려 있는 그림에서부터 신랄한 패러디로 인기를 끌고 있는 딴지일보까지 모두 키취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전자는 원론적 의미의 키취라 한다면, 후자는 그보다는 변형된, 조금 더 현대적 의미의 키취라 할 수 있겠다.

단지 복제의 의미로만 존재하던 키취가 우리 사회에서 힘을 얻게 된 것은 지난 90년대의 인디씬이 채 무르익기 전 황신혜밴드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단순한 코드와 ‘님과 함께’와 같은 곡을 편곡해 부르면서 싸구려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했고, 이는 인디씬이 시작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관광버스에서 인기를 얻은 이박사나 신촌-홍대 지역에서 독특한 음악을 선보이는 곤충스님 윤키와 같은 경우혹은 인디 만화잡지 COMIX도 키취 문화의 선봉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키취는 대중적인 성격을 띄지 못해 큰 힘을 얻지는 못한 채, 소수의 마니아만 만들어내고 사그러 들어갔다. 그것은 키취에서 메세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쇼’로만 이들을 치부해버리는 문화 평론가들과 이것을 소화해내지 못한 대중들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키취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었던 황신혜밴드와 어어부밴드와 같은 경우에는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가 되고 이슈화가 되었지만, 실제 음악을 접하기는 힘들었고 많은 이들은 음악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수식어만 뒤를 따라다녔다. 인터넷이 보급이 된 이후에는 그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만, 키취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루어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키취문화를 가장 강하게 어필한 것은 바로 딴지일보였다. 정치인에서부터 CF까지 모든 패러디할 수 있는 요소를 패러디하면서,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영향력을 행사한 딴지일보는 복제와 변형 그리고 사회비판이라는 키취의 요소를 모두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울랄라 시스터즈>나 <정글주스>와 같은 것도 결국은 같은 키취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청량리 뒷골목의 풍경과 세 여자의 촌스러운 복장은 단순히 웃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대 사회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키취 문화는 우리사회에서 싸구려 혹은 주접과 같이 의미 이상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상생활의 물품들을 모아 놓은 오브제는 그것의 일반회화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고, 일상생활의 소리를 샘플링 떠서 음악을 만드는 곤충스님 윤키의 음악은 고리타분한 대중음악의 그것만큼 인기를 얻지 못한다. 패러디는 아직도 코메디 영화의 한 방식이라고만 생각할 뿐, 사회의 문제를 이슈화시키는데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패러디에 대해 ‘명예훼손’이라는 굴레를 뒤집어 씌우기 까지 한다. 이것은 아직 우리가 과거의 예술적 권위에-예술은 근엄해야 하며, 유일해야 한다는-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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