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엿보기] '음란성' 문화행사
[문화엿보기] '음란성' 문화행사
  • 문재석 기자
  • 승인 2002.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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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바람이 음란하지 않은 사회를 만든다?

수년전 같으면 입에 담기도 민망한, 저속한 단어의 상징이었던 ‘음란’이라는 단어가 지난 달 28일부터 지난 4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32회 독립 영화제의 키워드도 ‘음란’이었고, ‘민족 발기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딴지일보에서 분리되어 나온 남로당 또한 창당했다. 최근에 있었던 문화 행사들은 <누가 음란을 두려워하랴?>, <음란 페스티벌>등의 이름을 달아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고, 원조교제나 동성애를 다룬 영화 작품들도 속속 영화관에서 개봉되고 있다.

심지어는 고려대학교의 ‘행복한 파트너십‘이나 연세대학교의 ‘성과 인간관계’와 같은 강의에서 자신의 성 경험을 토론의 대상으로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매 시간 강의실이 가득찬다는 뉴스도 접한다. 이는 구석진 곳에서의 음성적이었던 성에 대한 관념이 점차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행사에 출품하는 작품들은 성에 대한 직접적 표현을 꺼리지 않는다. 지난 독립 영화제나 퀴어 영화제에 나온 작품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어머니의 사랑을 포르노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김정구 감독의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나 남성의 공간인 군대에서 벌어지는 동성애 이야기 <정액의 힘>등과 같은 작품들은 불과 몇 년 전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롭게 상영되고, 이에 대한 관객의 반응 또한 사뭇 진지해졌다.

이것은 스크린 위에 난무한 살색 빛이, 혹은 드러난 성기가 단순히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섹스를 하고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 사람이 느끼는 순수한 감정, 성 정체성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데 단지 성이라는 매개체로 쓰인 것을 이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에 대해 지나치게 터부시하여 왔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음란과 퇴폐라는 낙인을 찍어 억압하여 왔다. 그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수많은 예술이, 움직임이 은폐, 왜곡되어 대중 앞에 선보이지 못하거나, 선보이더라도 그 의미를 크게 부여받지 못한 채 음란물 취급을 받아왔다. 심지어는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불명예를 떠안으며. 영화제나 페스티벌 중간에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태도 발생하기도 하였다. 관객들도 이러한 작품들을 음란하고 역겨운 작품으로 폄하하거나, 단지 성적인 쾌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왔다.

이러한 생각이 깨진 것은 성적 소수자들에 의해 성에 대해 깊게 생각할 기회를 가지면서부터이다. 하리수와 같은 트랜스젠더의 연예계활동이나, 그 이후 자신들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낸 성적 소수자 모임 등을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마련되고 성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되었다. 그 결과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가고 또 자신의 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성은 자신의 일부이며 소중한 것이고 성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임을 사람들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성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남과 서로 교환하고, 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바르게 인식하려고 한다는 의지에서만은 과거에 비해 한층 성에 대해 성숙된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성욕 또한 자신의 감정이기에, 이에 대한 왜곡없이 떳떳하게 발설하고 또 남의 이러한 솔직함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성적 수치심마저 버리고 자신의 성욕을 남에게 다 발설하는 극단론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성 그 자체는 결코 음탕하거나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부이라는 점이며, 아직은 독립문화 위주로 자리잡은 일련의 움직임이 점차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갈 때, 우리 사회는 성적으로 한층 더 성숙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점차 거세지고 있는 ‘음란한’ 바람은 결코 음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