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장] 제 6회 부산 국제 영화제
[문화현장] 제 6회 부산 국제 영화제
  • 강지영 / 신소재 4
  • 승인 2001.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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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회 부산 국제 영화제
‘영화의 늪’에서 즐겁게 허우적거렸던 부산에서의 며칠
영화 속의 시간을 통해서 관객은 자신의 시간을 체험한다. 택시기사 드니로의 밤거리를 싸늘하고 몽롱하게 느끼고, 심은하가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칠 때 내 사랑의 아픔을 떠올리며 눈물 흘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개인적인 감상만을 담아내기에는 아쉬운 게 많다. 내가 사는 사회를 비판 할 수 없고 변화를 이끌어 가지 못하며 사회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모든 신경을 절단한 신체와 같다. 그렇다면 영화는. 한 영화가 소소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면 어떤 영화는 전혀 새로운 시선과 미학을 보여주어야 하고 또 다른 영화는 사회의 아픔을 담아내야 한다.

대만의 차이밍량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한국 영화의 목표가 헐리우드 영화였음을 알게 됐다. 흥행만이 능사라는 생각이 한국 감독들 사이에도 팽배함을 느꼈다’라고 날카롭게 비판한 부분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졌다. 감독들의 책임만은 아니라 느낀다. 매년 매 계절 갱신되는 우리 영화계의 기록은 액션과 멜로의 어설픈 헐리우드식 조합들과 막대한 자본과 엽기적이고 폭력적인 관객의 감각이 세워온 것이다. 올해 가장 아름다운 한국영화라는 <나비>는 이틀만에 극장에서 내려질 위기에 쳐했었다. 상업성에 치우친 영화만 만들어 오던 감독이 반성하며 즐겁게 만들었다는 <라이방>은 결국 일주일을 못 채우고 이름을 내렸다 한다. 한국의 관객은 그저 깔깔대며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휴대폰 벨이 울리면 지금 재미있는 장면이라며 떠들어대도 괜찮은 영화만 찾고 있는 걸까? 극장은 훌륭한 작품을 내건다는 자부심 따위는 버려버린지 오래일까?이런 현실 속에서 어느덧 부산 국제영화제(이하 PIFF)는 여섯번째 해를 맞이했다. 내가 본 여섯번째 PIFF는 ‘영화의 늪’ 이었다. 며칠 간 부산에서의 감흥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으니까. 올해는 화제작은 물론 신인감독들의 작품들부터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좌석이 매진된 편이다. 나는 프랑스 감독 까뜨린느 브레이야(Catherine Breillat)의 을 첫 영화로 점찍어 매진된 표를 게시판을 통해 구하는데 성공했다.

PIFF의 매력 하나. 매진되었다고 해서 그 영화를 볼 수 없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사정이 있어 표를 다른 사람에게 되팔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거기서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포기할게 아니다. 그냥 남포동 바닥으로 뛰어들어도 된다. 단 일찍 가야 한다. 일찍 가면 취소된 당일티켓을 매표소에서 구할 수도 있고, 직접 다른 사람에게 팔려는 사람 막 표를 환불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을 보러 들어가던 나는 후줄근하고 자그만 체구의 소년을 보고 놀란다. 얼굴은 소년이다. 불혹을 넘겼을 텐데 시골 고등학생의 얼굴을 한 김기덕 감독이다. 왠만한 길거리에서 100명이 스쳐가도 김기덕 감독을 알아보지 못할텐데 이곳에서는 다들 싸인을 받고 캠코더로 찍어대고 나는 감동해서 얼굴까지 붉어진다. 혼자서 쭐래쭐래 영화를 보러온 감독은 싸인 공세에 바로 문 앞에서 발이 묶였다. 두번째 매력, PIFF에 가면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국내 영화배우들의 평범한 모습, 흠모하던 국내외 감독, 해외 스타들까지 과장을 좀 하자면 ‘발에 툭툭 차인다’. 또한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야외무대에서 배우, 감독들과 행사를 갖기도 한다.

PIFF의 세번째 매력은 국내에서 개봉하기 힘든 영화, 혹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라이방>, <수취인 불명> 같은 영화들은 이미 극장에서는 내려지고 심지어 비디오로 나오기도 했지만 스크린으로 꼭 보고 싶어하는 관객을 위해 상영되었고, 매진되었다. 올해는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타이영화를 특별히 ‘타이영화의 힘’ 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상영해서 보기 드문 타이영화를 관람할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고, 급진적인 작품세계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유고의 두샨 마카베예프감독 특별전을 마련했다. 쥴앤짐의 히로인 잔느 모로를 초청해 특별전을 열고, 신상옥 감독의 걸작들을 올렸다.

매력 네번째, 영화를 본 후 바로 그 영화 감독에게 질문도 할 수 있고 작품의 의도를 들을 수 있고 함께 토론할 수도 있다. GV(Guest Visit)표시가 되어있는 영화를 보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나의 경우 <꽃섬>,<나쁜 남자>,<라이방>,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의 작품을 보면서 감독과 배우를 직접 만날 수가 있었다. <꽃섬>의 경우 영화가 끝난 후 감독 송일곤이 관객들을 가까운 호프에 초대해 술과 안주를 ‘쏘았다’. PIFF의 매력 다섯번째는 바로 공짜. 남포동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부스들에서는 나름대로의 이벤트를 준비하는데 그 중 설문조사를 하면 잡지를 준다든지, 문제를 맞추면 상품을 준다든지 하는 행사들로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붙잡아둔다.

6회째 PIFF의 결과가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길거리는 전단지와 쓰레기가 널부러져서 어느 해의 PIFF거리보다 지저분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 거리에는 휴지통이 전혀 설치되어있지 않았고, 국가의 지원 중단으로 쓰레기통 몇 개 세워놓을 만큼도 예산이 여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라 영화인은 후원금을 모아야 하기도 했다. 개막작에 대한 관객의 불만족도 있었고, 극장에서는 늦게 들어와서 라이터를 켜서 자리를 찾는 사람, 영화 상영중 휴대폰 벨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5일 상영하기로 했었던 거장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제작한 7편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 <탈출기>는 이적표현물 판정으로 국가로부터 상영을 제재 받아 국가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 영화제라는 느낌마저 가지게 했다.

또한 예년에 비해서 화제작이 적은 편이어서 관객들의 열기를 더하기에 부족했던 점이 있었고, 오픈 시네마 상영을 야외에서 해운대 BEXCO로 옮긴 것에 관객들이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이런 곳곳의 잡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PIFF를 보면서 점차 유명무실한 영화제가 되어갈 것이라고는 누구도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해외 게스트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으며 <나쁜 남자>나 <고양이를 부탁해> 등의 한국영화에 대한 해외의 관심과 요청을 들을 수 있었다. PPP(부산프로모션플랜)등 영화 산업적으로 중요한 행사들이 예년에 비해 많이 열렸다. 아시아 최고의 영화축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6회 PIFF의 성공 여부는 나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이번 부산에서 내가 받은 감동은 다른 것은 잊게 해주었다. 그날 PIFF극장을 가득 메운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눈을 빛내던 처음보지만 낯설지 않은 사람들-그런 우리끼리의 흥분과 열정은 쉽게 삭지 않는다. 어느 극장에서나 두 세개의 관을 차지하는 조폭 영화, 스타의 영화도 물론 보고싶을 때가 있고 재미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던지 독창적이고 변형된 시선의 영화, 사회의 아픔을 보여주는 영화 뿐 아니라 미학적인 영화 등 다양하게 영화를 즐길 줄 알 것이다. 그런 관객들이 있기에 우리 영화가 양적으로만 성장하거나 헐리우드의 뒷굼치만 따라가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포항의 눅눅하고 불편한 극장에서 끊어지는 소리를 참으며 영화를 보느니 방에서 컴퓨터로 영화를 보겠다, 영화잡지로 만족하겠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꼭 내년 이맘때는 부산국제 영화제에 참가해서 스스로 찾아 본 영화의 감동을 꼭 느끼고 위에서 다 이야기 하지 못한 PIFF의 매력에 취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