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평론가] '천국보다 낯선(1984)'
[나도평론가] '천국보다 낯선(1984)'
  • 박정익 / 전자 4
  • 승인 200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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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보다 낯선(1984)
DVD만이 보여주는 섬세함을 음미하는 즐거움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은 짐 자무쉬가 1984년 단편 , 을 덧붙여 장편으로 만든 흑백 영화이다. 어떻게 보면 충분히 졸린, 고전이라 불릴만한 그리고 누군가의 영화 베스트 목록에서 그렇게 여겨지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제목의 패러디나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쓸쓸히 바닷가에 서있는 장면의 포스터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뉴욕에 사는 윌리의 고향, 헝가리에서 사촌 에바가 윌리를 찾아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며칠 후 에바는 아주머니가 있는 클리블랜드로 떠나고 일년 후 윌리는 친구 에디와 함께 에바를 만나기 위해 클리블랜드로 여행을 떠난다는 로드 무비의 형태를 띈 간단한 줄거리다.

<천국보다…>은 DVD의 장점인 화질, 음질, 자막과 다양한 부록을 즐기기에 적절한 타이틀은 아니다. Dolby Digital Mono에 흑백화면, 부록이라고는 짧은 Behind The Scenes 뿐이다. 영어 자막도 없고 프랑스어, 스페인어 자막과 영어 Closed Caption을 지원한다. 그러나 DVD의 구입과 감상 목적이 앞뒤로 날아다니는 5.1ch의 총알소리와 화려한 색감의 영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어떤 영화를 소장하고 여러 번 감상한다는 것은 단순한 소유욕의 충족에도 목적이 있지만 영화를 다시 보면서 장면 하나 하나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떤 영화의 작은 구석의 소품에 감독이 관객에게 보내는 작은 메시지가 담겨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도 여러 번 보면서 영화관에서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것을 깨닫곤 했다. 처음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을 때, 주인공 윌리, 에바, 에디의 우스꽝스러운 얼굴 표정과 대화에 정신없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에바 역의 Eszter Balint의 귀여워 보이는 얼굴과 함께 유쾌한 영화로 기억에 남았다. (이 영화의 LA Times 평은 “A very, very funny film!”이다. ) 더구나 이 영화에는 나름대로 멋진(?) 반전도 있다. 비디오 테이프로 다시 이 영화를 봤을 때, 영화관에서 집중해서 보던 배우들의 얼굴, 사건의 흐름보다 화면의 구도와 인물들간의 관계와 상황을 보면서 슬픔과 외로움이라는 다른 느낌을 이 영화의 감상에 추가하게 되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비디오 테이프로는 도저히 흑백 영화에서의 어두운 곳에서의 세세한 부분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얼굴이 웃고 있는지 찡그리고 있는 표정인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에바, 에바 의 남자친구, 에디, 윌리가 함께 쿵푸 영화를 보는 영화관 안에서의 장면이 대표적인데 스크린에서만 나오는 어두운 빛으로는 에바 남자친구의 에바에 대한 관심, 에디의 천진난만함, 에바의 권태로움, 윌리의 절망감이 표시되는 각각의 개성 있는 얼굴을 보면서 깔깔 거리며 웃기에는 역부족이었다. DVD의 날카로운 영상은 다시 배우들에게 표정이라는 것을 돌려주었다.

이어 나오는 에바와 에디, 윌리의 파라다이스, 플로리다로 탈출하는 짙은(!) 밤, 끝없이 이어진 고속도로와 곤히 자는 Eva의 모습에서 그들의 천국은 이미 어디에도 없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 흑백영화일 수밖에 없게 느껴지는 데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 미국 사회의 공허함과 황폐함이 흑백이라는 영상 자체에 잘 나타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에 더욱 이 영화를 적절한 Contrast를 가진 DVD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내겐 행운이다.
이 DVD 역시 보통의 DVD와 마찬가지로 와이드스크린의 화면 비율을 가진다. 국내 출시된 비디오 테이프의 대부분이 저지르는 만행 중에 하나가 4:3 TV 화면 크기의 고집이다. 비디오 테이프 출시사는 좌우가 긴 실제 영화를 4:3 TV 화면에 맞추기 위해 화면 좌우를 자르게 된다. <천국보다…>는 로드무비다. 쓸데없어 보이는 길의 장면도 많이 나오는데 4:3 TV 화면으로는 스크린의 이쪽과 저쪽 하나의 길을 한 장면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윌리 일행이 플로리다에 처음 도착해서 에디가 선글라스를 사오는 장면과 플로리다 해변 가에서 윌리가 바닷가 저편에서 에바와 에디를 향해 걸어오는 장면은 서로의 시선이 엇갈리면서 한 장의 엽서 같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로 이 영화의 포스터다. 와이드 스크린 예찬론에 의해 약간의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자면 이 장면에서 서로의 시선이 빗겨나가 이어져 시선의 화면 반대쪽을 향한 충분한(!) 빈 공간의 공허함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한다.

고등학교 때 이 영화를 보고 포스터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는데 공허함 속의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해야 하나…. 내겐 신비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OST라 부를만한 것이 에바가 즐겨 듣는 절규하는듯한 목소리의 Screamin’ Jay Hawkins의 “I Put a Spell on You” 뿐인데 이 영화는 이미 내게 충분히 마법 같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