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포 구현
가상세포 구현
  • 조광현 / KAIST 바이오및뇌공학
  • 승인 2007.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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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바이오융합 연구의 도전 프로젝트
1929년 캐논(Cannon)이 유기체를 하나의 동역학시스템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이래로 카우프만(Kauffman)의 예지 넘치는 진화적 논제를 거쳐 휴먼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유전자서열 정보가 밝혀지자 이제는 급기야 ‘가상세포’를 구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과연 가능한 것일까?

현대의 생명과학은 복잡한 생명현상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그동안 전혀 다른 영역에서 발전되어 온 공학·수학·물리학 등 이른바 드라이-사이언스(dry-science)와 융합하여 ‘시스템생물학(Systems Bi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를 창출하기에 이르렀다(sbie.kaist.ac.kr). 그 이면에는 지금까지 생명과학계의 주된 연구가 특정현상에 관여하는 요소를 ‘발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온 데 반해 정작 생명현상의 숨은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비로소 복잡한 생명현상을 만들어내는지 ‘논리’적인 탐구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청이 잠재되어 있다.

우리는 특정질병과 관련된 유전자·단백질 등의 발견에 관한 뉴스를 종종 접하여 왔지만 그와 같은 발견으로 인해 질병이 극복된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는 생명현상이 특정요소의 작용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생명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복잡한 생명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다. 즉, 생명시스템을 이루는 성분들 간의 구성과 동역학적 특성을 집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모든 생체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초래하는 분자·세포·조직·장기 그리고 유기체들 각각에 있어서 시공간적 상호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이 경우 주된 문제의 출발은 세포작용의 네트워크가 다수의 유전자·단백질 및 다른 분자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에 기인한다. 시스템생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러한 조절작용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생명현상 속에 잠재된 지배원리에 대해 보다 깊은 통찰력을 얻고, 나아가 생명현상의 조절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제어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전통적인 생물학 연구방식이 추구해온 생명시스템의 구성요소 발견과 발견된 요소의 물리적 특징을 규명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수학적 모델링을 통한 정보의 재구성과 이를 토대로 분자단위 혹은 그 이상의 레벨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요소들 간의 네트워크와 신호전달경로 등을 시스템 차원에서 분석, 시뮬레이션 해봄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다.

최근 연이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생명현상에 대한 보다 정밀하고 다양한 측정이 가능해짐에 따라 측정된 데이터를 시스템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시스템생물학이 신기술 융합연구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며 급부상하고 있다.

시스템생물학의 여러 연구 분야 가운데 세포의 특정 신호전달경로에 대해 정량화된 실험데이터를 토대로 수학적 모델을 정립하고 이를 컴퓨터시뮬레이션을 통해 분석하여 다양한 자극에 대한 신호전달시스템의 반응을 예측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다 보면 세포내 신호전달시스템의 비선형성으로 인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학적 모델링과 실험적 검증과정을 재차 반복하는 가운데 많은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시스템생물학적 접근의 진정한 과학적 가치이다.

세포생물학과 분자생물학에 대해 기초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상세포’라는 슬로건이 현재로서는 얼마나 지나치게 허황된 것인가를 쉽게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의 예와 마찬가지로 가상세포 자체를 얼마나 실제 세포와 유사하게 구현할 수 있는가 보다는 그러한 목표를 향해 세포내의 여러 조절작용을 정량적으로 분석하고 실험을 설계함으로써 기존에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조절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는 데에 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비교적 조절메커니즘이 단순한 미생물을 대상으로 대사작용에만 국한하여 기존 정보를 취합해서 대사산물을 극대화하도록 조작하는 방식의 대사공학은 이미 부분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어 오고 있다. 고등동물세포에 대해서도 암 등의 질병과 관련된 일부 특정신호전달경로나 유전자조절작용 등에 대해서 실험에 기반한 여러 수학적 모델들이 개발되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시도를 통해 종래에 이해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작용원리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또한 일례로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의 시스템생물학 및 바이오영감공학연구실에서는 국립독성연구원 용역과제로서 사람의 간세포를 대상으로 다이옥신(TCDD)이라는 특정 독성물질을 투여하였을 때 세포내부의 신호전달시스템과 유전자 네트워크가 교란되는 반응과정에 대해 대규모 생화학실험으로부터 가상세포를 구현함으로써 컴퓨터상의(in-silico) 독성평가시스템을 개발해오고 있다.

가상세포의 구현은 이렇듯 우리가 상상하는 실제 세포의 정확한 가상적 묘사에 당장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과학적 결실을 가져다주고 있으며,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주고 있는 것이다.

1968년 메사로비치(Mesarovic) 박사가 그의 저서에서 시스템생물학을 최초로 소개하며 예견한 과학적 발전이 40년이 지난 지금 ‘가상세포’라는 혹 지나치게 야심적인(ambitious) 슬로건을 통해 비로소 점차 구현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