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의 향연을 찾아서 ③ 쓰기와 전달 - 타인과 하나 되기
의사소통의 향연을 찾아서 ③ 쓰기와 전달 - 타인과 하나 되기
  • 박상준 /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06.10.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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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왜 쓰는가? 읽히기 위해서 쓴다!
1. 글쓰기의 어려움과 중요성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글을 쓰는 일은 대단한 고역이다.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인터넷에 리플을 단다거나 친구에게 짤막한 문자메시지를 남길 때 등을 제외하면, 사회활동으로서의 글쓰기는 언제나 우리를 긴장시키게 마련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아니 이들에게는 글쓰기야말로 일종의 천형(天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글을 쓸 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는 일보다 더한 고문이 어디 있을까.
글쓰기가 이리 고된 것은, 명료하게 의식하든 못하든 글을 쓰는 일의 의미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은 사람’이라는 본질주의적인 명언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의사소통행위로서의 글쓰기란 우리의 주된 사회활동임을 너나없이 알고 있는 것이다.

글로 관계 맺는 주변사람들에게 우리들 각자는 항상 글로 판단되게 마련이다. 연구계획서를 잘 쓰지 못하면 연구비를 따올 수 없고, 연구 성과를 논문으로 잘 쓰지 못하면 학위 취득이나 논문 게재를 바랄 수 없다. 제안서를 잘못 쓰면 일에 착수조차 못하고, 시험 답안을 제대로 못쓰면 좋은 학점은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뿐인가. 메일 한 통을 성의 없이 쓰면 무례하거나 실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고, 연애편지를 제대로 못 쓰면 로미오나 춘향이는 꿈속의 일일 뿐이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글은 사람’이라는 말은 현대에도 명언이 된다. 인격이 글에 드러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글로써 우리의 능력이 가늠된다는 의미에서 바로 그러하다.

2. 말과 글의 의미

글쓰기의 실제적인 의미와 중요성도 이렇게 대단하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이보다 한층 더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다음 시구로 생각을 열어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 1~2연).
이 시에서 우리는 행위와 상황 변화를 하나씩 볼 수 있다. 이름을 불러주는 명명 행위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 ‘꽃’이 되어 ‘의미’를 갖게 되는 변화가 그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전자가 후자를 낳았다는 점이다. ‘꽃’이라고 불림으로써 어떤 존재가 꽃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일견 놀랍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런 생각은 그리 기발하거나 낯선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도 동일한 생각이 담겨 있을 만큼 이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과 어둠에 이름을 부여하여 낮과 밤이 생겼다고 되어 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그에게 이끌려온 창조물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이러한 명명 행위는 상대에 대한 권위, 자신의 지배적인 지위를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존 월튼 외, ).

이 두 가지 예는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이 대상을 창조하고 의미를 구현하는 행위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언어 자체가 ‘동일성’과 ‘정체성’을 부여하고 만들어낸다는데 이르게 된다. 니체의 생각을 따라 말하자면, ‘십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가 같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나’라는 혹은 ‘홍길동’이라는 변치 않는 주어를 사용하여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동일한 주체로 만들고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한다고 할 수 있다. 주변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에 대한 명명 행위는, 알 수 없어서 두려운 것을 알 수 있는 것, 친숙한 것으로 바꾸어 우리와 동일화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러한 생각을 일반화해서, 명명 행위를 포함하는 언어활동이란 우리가 세상을 대상화하고 인간화하는 행위라고 정리할 수 있다. 어떠한 사상(事象)을 향하여 말을 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즉 주체인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 존재로 만들고 거기에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위에 더하여 좀 더 구체적인 기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샬 맥루한에 의하면 의사소통의 주요 매체로서 글쓰기는 크게 두 가지의 기능을 갖는다. 사고를 논리화하고 비가시적인 기능과 관계를 가시화하는 것인데, 글쓰기의 이러한 기능에 의해 사고의 문법과 과학이 발명되었다고 하였다(<구텐베르크 은하계>).
어떠한 대상이든 그 의미와 효과를 알고 있을 때 그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말과 글의 사용에서도 이상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위에, 우리 시대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하면 충분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말하기나 글쓰기가 주체들 상호간의 교섭을 통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성 행위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행위 일반이란 항상 상호적인 것이며 이러한 상관관계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절대적인 것을 전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의사소통이란 더 이상 권위적인 동일화의 욕망에 따르는 것일 수 없으며, 앞서 지적한 언어의 여타 기능들을 생각하면 단순한 유희일 수 없음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을 전달하여 소통 과정 속에서 새로운 사상(事象)을 생성하는 것, 이러한 창조성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의사소통이 갖는 본질적인 기능이다.


3. 글쓰기의 자세와 방식

글쓰기에 있어서 갖춰야 할 바람직한 자세와 우리가 써야 할 글의 구성 원리는, ‘전달·소통·생성’을 강조하는 바로 앞의 지적에서 도출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쓰는 나를 중심에 두지 않고 읽을 독자를 고려하는 자세이다. 말을 할 때 청자를 의식하듯이 글을 쓸 때도 독자를 의식해야 한다.
언뜻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 같고 우리들 모두 그렇게 쓰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실은 거의 반대에 가깝다. 의미가 재구성되지 않는 난삽한 글을 써 두고 독자들이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하거나, 실제로는 엉뚱하게 써 두고 의도만을 앞세워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글을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거나,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등등의 답을 내놓는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잘못을 범하기 십상이다. 쓰는 자신을 앞세워 사고할 뿐, 읽는 독자를 고려해서 글쓰기 행위를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의사소통행위의 일환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자리에서는 다른 답이 나오게 된다; “글을 왜 쓰는가? 읽히기 위해서 쓴다!”
읽히기 위해서 쓴다는 자세를 갖출 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증대된다. 독자의 올바른 해독 가능성을 중시하게 되면, 그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글을 쓰는 상황’도 잊지 않게 되고 ‘글의 목적’ 또한 명확히 의식하여 글에 반영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의미 구조가 명료해서 해석하기에 좋은 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독자를 배려하는 서비스 정신에 입각한 글, 친절한 글이 가능해진다.

서두와 결어를 갖추는 올바른 구성 방식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끌어진다. 글의 서두는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독자를 글의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내용의 전개 과정에서 미세한 변화가 있을 때 문단을 나누는 것은, 독자의 이해 과정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결어 또한 마찬가지이다. 독자의 기억을 돕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전체 내용을 요약적으로 강조하는 결어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를 익히게 되면, 글쓰기의 실제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도 저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나의 글이 독자에게 이해되는 순간, 글 자체가 새로운 존재가 되면서 그로 인해 나와 타인이 하나가 되어, 우리가 포함된 세계 또한 새롭게 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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