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의 향연을 찾아서 ② 읽기와 해석 - 세계 이해의 부단한 도정
의사소통의 향연을 찾아서 ② 읽기와 해석 - 세계 이해의 부단한 도정
  • 박상준 /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06.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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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자연·사회·인간을 이해하는 기본 행위
받아들이고 추론하며 대화하는 세 층위로 구성
1. 읽기의 역사와 의미
어떠한 사상(事象)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기원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된다. ‘읽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인류 최초의 읽기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양의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읽기 행위는 갑골(甲骨)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기원전 13세기 경 은나라에서는 거북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생긴 균열을 통해 신의 뜻을 읽고자 했다. 거북점[龜卜]이라는 이러한 읽기 행위는, 농경문화를 이룬 주나라에 이르러서 시초(蓍草)라는 풀의 줄기를 사용하는 시서(蓍筮)로 이어지고 후에 대나무를 사용하는 서죽(筮竹)으로 바뀌어 <주역>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노태준, <주역>, 한국교육출판공사, 해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의 뜻을 헤아리고자 했던 ‘읽기의 목적과 의도’이다.

그 후 읽기 행위는 그 대상을 더욱 넓혀 천사만물과 인간까지 끌어안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일월성신을 읽는 천문(天文), 산천초목을 읽는 지문(地文), 인간과 그들의 세상을 읽는 인문(人文)이다. 이들 개념에서 ‘문(文)’의 의미는 ‘감추어져 있는 기본원리의 발현’이다(조동일, <인문학문의 사명>). 여기서, 읽기 행위의 본질이 확장되어 동양의 학문체계가 성립되었으며 그 본질은 ‘삼라만상의 기본원리 곧 신의 뜻’을 읽고자 함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읽기의 최초의 형태는 천체를 대상으로 하여 신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별들은 하늘이 써놓은 문자로서 신들의 의지를 담고 있으며, 별들의 움직임이나 징후는 개인과 역사에 작용하는 신들의 계획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헬레니즘시대에 성운의 징후를 가리켰던 ‘테마(thema)’가 오늘날 텍스트의 주제를 의미하는 말이 된 데서 알 수 있듯, 천체를 통해 신의 뜻을 읽는 것이 읽기의 근간이었다.

문자의 발명에 앞선 읽기 행위는 신체를 대상으로 하면서 신석기시대에 이미 의술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질병 자체를 신의 벌이나 신의 은총이 사라진 상태로 해석하였기에, 신의 의지를 알아낼 수 있어야만 치료할 수 있다고 믿기까지 했다(한스 요아힘 그립, <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 이와 같이 천체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서양의 읽기 또한 삶을 주재하는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것이었다.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인류 최초의 읽기는 우리에게 읽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그것은 읽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자면 읽는 주체 곧 독자가 아니라 읽고자 하는 대상 즉 신의 뜻이 의미 있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더하여, 읽기 행위를 추동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참된 이해의 열정’이었음을 강조해야겠다.


2. 낭독, 타자, 진리
인류 최초의 읽기 행위가 대상의 본의를 중시하는 것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근대 이전의 ‘읽기’가 ‘듣기’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옛날의 읽기는 기본적으로 ‘소리 내어 읽기’ 곧 낭독이었다. 낭독이 읽기의 보편적인 방식이었던 데에는 두 가지 연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문자 해독 능력이 일반화되지 못했던 사회 상황이다. 국가의 정책이나 성경의 말씀은 관리나 사제 같은 중개자의 읽기를 통해 민중에게 전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을 전문적으로 읽어 주는 직업인까지 등장하게 된다. 조선 시대의 ‘전기수(傳奇搜)’가 좋은 예로, 이들은 엔터테이너로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 후예가 조선 후기의 ‘강독사(講讀師)’들이다. 이들은 서울 북촌을 찾아다니며 구성진 이야기를 펼쳐 양반 부녀의 손수건을 적시는 데 따라 보수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도 유사하다. 에도[江戶] 말기에서 메이지 시대에 걸쳐 ‘강담사(講談師)’들의 활약이 대단하여 천황 앞에 서는 경우까지 있었다. 음유시인의 전통을 가진 서양의 경우도 다르지 않아서, 19세기에는 전 유럽에 걸쳐 작품 낭독회가 크게 유행할 정도였다.

낭독으로서의 읽기가 보편적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보다 근본적이다. 문자에 비해 음성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태도 곧, 데리다가 비판적으로 지적했던바 서구 형이상학의 음성중심주의가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여기서 말·음성이란 자기현존적인 의식에 가까이 있는 ‘진리로 가는 출입구’로 여겨지며(크리스토퍼 노리스, <데리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 동일적 의미를 드러내는 형이상학의 언어 곧 ‘존재의 목소리’이자 ‘신의 음성’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을 읽는 행위는 말하는 것과 구분될 수 없는 것이어서 “침묵하고 있는 문자들, 즉 스크립타(scripta)에, 말로 표현된 단어, 즉 베르바(verba)가 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다시 말해 혼을 불어넣어야 하는 의무감”을 수반하고 있었다(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요컨대 전근대사회에서 낭독이 일반화된 것은, 읽기를 ‘듣는 행위와 관련’짓는 한편 ‘진리를 드러내는 행위로 생각’한 결과라 하겠다.


3. 읽기의 바람직한 자세와 방법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전문 지식의 깊이가 심화됨에 따라 이제 우리는 묵독이 보편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문자에 앞서는 음성언어의 권위가 사라진 지 오래며, 그와 더불어서 글을 읽는 행위의 의미도 바뀌었다. 이제 문제는 도(道)나 천리(天理), 본질의 궁구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소통이 되었다.

하지만 읽기의 역사가 알려주는 중요한 의미와 그에 따른 읽기 방법까지 변화한 것은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중요하다는 사실, 읽기란 필자 및 청자와 관련된 소통구조 속에서 수행된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텍스트의 내용이 신의 뜻이나 형이상학적 본질에 닿아 고정되든 아니든, 그리고 필자가 신으로 상정되든 아니든, 읽기의 의사소통 행위로서의 성격에는 변함이 없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읽기는 읽는 ‘나’ 이외에 한편으로는 듣는 ‘너’를 다른 한편으로는 글을 쓴 ‘그’를 상정하면서 대상에 주목하는 의사소통행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읽기의 자세와 방법이 자연스레 이끌어진다.

읽기에 요청되는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텍스트를 존중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읽기는 언제나, 텍스트가 펼쳐 보이는 내용 속에서 합리적인 핵심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내 편의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씌어진 대로 읽는 것, 좀 더 나아가서는 행간을 읽어 필자의 의도를 추론해 내려는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해석학의 기원을 이루는 성서해석학의 네 단계 해석 방식에서부터 잘 나타나 있다. 성서를 해석하는 네 단계란 축자적[literal]·알레고리적·도덕적·비의적[anagogical] 독해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그것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물로 구약을 읽기 시작하여 예수의 행적에 대한 예표로 이해한 뒤, 죄에 속박된 자신을 돌아보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운명과 신의 섭리를 깨닫는 중층적인 과정이다(F. Jameson, The Political Unconscious.)

현재 대학입학고사에서 치르는 언어영역의 독해 부문이 사실적, 추리·상상적·비판적 독해의 셋으로 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일단 씌어진 대로 정확히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그 위에서 행간을 읽어 필자의 의도를 추론해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현실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앞의 두 단계를 통해 텍스트의 합리적인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뒤 필자와 대화하며 창조적으로 사고를 확장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세 단계 읽기’론의 진의라 하겠다.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읽기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읽을 수 있는 모든 대상을 텍스트로 하여 그 본질을 찾아 나서고 끝내는 서로 대화하면서 자신을 확장하는 것, 이야말로 참된 읽기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모쪼록,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생각하며 읽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