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도’의 통계적 확률과 ‘믿음’의 논리적 확률
‘빈도’의 통계적 확률과 ‘믿음’의 논리적 확률
  • 이상원 / 과학문화연구센터 연구조교수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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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문제 제기는 과학자의 인식기초 계기
오늘날 확률은 과학의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쓰인다. 하지만 19세기 말까지도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확률 이론의 발전은 주로 20세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 이전에도 확률 이론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확률 이론의 대부분의 진전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성취되었던 것이다. 확률이 과학에서 이렇게 널리 쓰이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확률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가 존재하지 않으며 몇 가지 해석들이 제시되어 왔다.

확률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빈도’(frequency)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belief)과 관련된 것이다. 과학철학자 카르납(Rudolf Carnap, 1891-1970)은 전자를 ‘통계적 확률’이라 하고, 후자를 ‘논리적 확률’이라 한다. 이글에서는 이 두 가지 종류의 확률이 지니는 과학철학적 의의를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여기서 두 확률 개념과 관련한 논란을 해결하고자 하지 않으며, 두 개념을 정리하고 그것들이 갖는 과학과 철학의 대화를 위한 함의를 추적할 것이다. 통계적 확률은 과학 활동 및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매우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개념이다. 반면 논리적 확률은 일반인과 과학자에게 낯설거나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과학철학자들은 통계적 확률과 논리적 확률이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다고 주장해 왔다.

빈도와 관련된 확률, 즉 통계적 확률은 ‘세계가 어떠하냐’와 관계가 있다. 100원 짜리 주화의 앞면이 나올 확률은 1/2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것이 빈도와 관련된 확률의 한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 1/2이라는 확률은 100원 짜리 주화를 실제로 던졌을 때 얻게 되는 값으로 볼 수 있다. 즉 동전을 던지는 사건의 긴 연쇄 속에서 우리가 얻게 될 값이다. 단 한번의 시행, 즉 단일 시행은 일반적으로 확률값 구하기와 관계가 없다. 이 1/2은 주화 던지기의 상당히 긴 연쇄 속에서 얻는 빈도인 것이다. 이러한 시행의 긴 연쇄에서 얻는 값 1/2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100원 짜리 주화라는 대상의 행동에 관해 말해준다. 물론 주화던지기 시행에 쓰이는 주화는 특수하게 제작되어 객관적 확률값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앞면이 뒷면보다 현저하게 무겁게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행의 조건이 시행의 결과에서 나오는 빈도에 바로 영향을 미치므로 빈도 수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조건이 시행 이전에 통제되어야함은 물론이다. 통계적 해석은 1920년대에 과학철학자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와 과학자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 1883-1953)에 의해 발전되었다.

믿음과 관계된 확률, 즉 논리적 확률은 ‘이론(가설)과 증거 간의 지지 관계’와 관계가 있다. 논리적 확률은 우리의 주장과 그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 사이에 성립하는 확률이다. 지질학 분야에서 제기된, 중생대 말에 있은 공룡의 멸종과 지구 밖에서 날아들어 지구 표면에 충돌한 운석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주장이 논리적 확률의 한 예가 된다. 과학자들이 지표와 운석의 충돌 시에 생겨났으며 세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이리듐(iridium) 집적층을 증거로 삼아, 운석 충돌에 의해 공룡의 멸종이 발생했다는 이론이 지지될 확률이 90%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하자. 이때의 90%라는 확률은 세계가 어떠하냐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이론과 그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 간에 성립하는 확률이다. 즉 증거에 의거한 어떤 이론의 신뢰의 정도를 나타내주는 확률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할 때 어떤 이유에서 그 주장을 믿게 되느냐와 관계된 확률이 논리적 확률이다. 이 논리적 해석은 상당수의 과학자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논리적 해석은 1920년대에 경제학자로 잘 알려진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 1930년대 말에 지구물리학자 제프리즈(Harold Jeffreys, 1891-1989), 1950년대에 카르납 등에 의해 발전된 개념이다.

빈도와 관계된 확률은 일상적인 생활사와 관련이 깊은 개념이다. 각종의 노름(예를 들면, 주사위, 카드, 룰렛)과 경마 등이 그 예이다. 실제로 확률은 수학자나 통계학자의 머리에서 먼저 이론으로 만들어져서 이들 분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론과 무관한 도박의 세계에서 출발해서 이론적 작업 안으로 들어왔다. 도박이 확률 이론의 주요 기원인 셈이다. 어떤 주화를 가지고 노름을 할 때, 어떤 이가 주화를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오면 그 사람이 상대에게서 만원을 받고 뒷면이 나오면 상대에게 만원을 주는 노름이라면, 노름을 하고픈 이는 앞면이든 뒷면이든 어느 쪽에도 승부를 걸만할 것이다. (물론 이때 동전이 멀쩡한 것이며 특수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 즉 통계적 확률이 1/2이기 때문이다. 만일 앞면이 나올 확률이 4/5이고, 뒷면이 나올 확률이 1/5이었다면, 아마도 뒷면에 거는 노름꾼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 기상학자가 저녁 뉴스 시간에 나와서 내일 비가 올 확률이 95%라고 말했다면, 대다수의 시청자는 다음날 우산을 지니고 집을 나서게 될 것이다. 이런 몇몇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빈도와 관련된 해석은 우리의 행동을 정하는 데에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즉 통계적 해석은 우리의 삶 곳곳에 빈번히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세계를 어떤 식으로 해명해 보려는 우리의 이론과 그 이론이 증거에 의해서 어떻게 지지되느냐에 관한 관심 역시 인간의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물론 일반인의 대다수가 이러한 관심을 갖기보다는 주로 과학자가 이에 보다 정신을 집중시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논리적 확률은 주목할만한 개념이라고 하겠다. 또한 논리적 확률은, 어쩌면 과학자 이상으로, 이론과 그것의 경험에 의한 정당화에 관심을 쏟는 과학철학자의 일부에게 주요한 논구거리가 되어 왔던 것이다.

과학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개념적’ 기초는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일선 과학자가 이런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능력을 지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과학자가 예외적으로 과학철학에 깊은 지식이 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그것이 승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확률 해석의 문제는 과학자와, 특히 과학철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어 왔으며, 그 자체가 과학자와 철학자의 관심사가 될만한 것이다. 철학자의 문제 제기는 과학자로 하여금 과학 활동의 인식적 기초에 대해 숙고하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역으로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과학자의 어떤 식의 대응과 참여는 철학적 논의를 심화시키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의 조언과 반응을 통해 철학자는 과학의 실제 과학 활동에 근거하여 보다 현실적인 과학철학적 작업을 진전시킬 수 있게 된다. 과학과 철학의 대화는 거창한 표어에서 시작될 수 있겠으나, 단순히 서로의 작업에 보다 관심을 보이고 반응을 나타낼 때 그 대화는 즐거워지고 심화될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과학 활동의 조건은 이러한 대화를 위한 긍정적 환경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장기적으로 현재의 조건은 개선될 것이며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과학문화를 전파하고 정착시키는 일이 과학철학자나 과학사학자만의 몫이 아님은 당연하다. 이 일을 성공시키는 데에는 과학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