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 프랑켄슈타인
부시 대 프랑켄슈타인
  • 이상하 / 경상대학교 교육연구원 학술연구 교수
  • 승인 2004.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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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는 과학·철학적 바탕에서 논의돼야···관념적 논의대상 될 수 없어
“인간 생명은 하나의 창조이지 일용품이 아니다. 인간 생명은 사려 깊지 않은 실험을 위한 연구재료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 부시가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 금지와 관련해 한 발언이다. 인간 생명을 창조로 보는 것은 그의 종교적 원
리주의 정신을 반영한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만약 우리보다 뛰어난 외계 종족이 생존을 위해 지구를 식량자원 기지로 만든다면 외계 종족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일까? 인간도 가축을 사육하고 잡아먹는다. 모든 유기체는 생존을 위해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다만 인간은 타 동물보다 좀 더 복잡한 문제를 풀뿐이다. 보편적 인권의 환상은 인간 생명 기원의 연구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낳는다. 그 알러지 반응은 다수의 종교인과 진보적 지식인에게서 나타난다. 이라크 파병 반대에 대해서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인권에 대해서는 아니다. 생명존중의 전제 조건이 곧 인권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 허용론자도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다.

초기 배아, 곧 수정 이후 4에서 8분화한 수정란까지를 인격체로 보아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보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
다.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논의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생존권과 배아의 생존권 중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산모와 태아 둘 다 죽는 상황이라면 산모를 살려야 한다는 데 다수가 동의한다.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도 같은 맥락에서 허용할 수 있다.

국내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 반대론자들은 주로 인간 복제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언젠가 체세포 핵에 담긴 프로그래밍을 완전히 해독될 날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생물학이 이런 수준에 이르렀을 때 과학자가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만들고 조작할까? 인간 복제의 가능성을 경고하는 이들은 인문학의 제어 대상으로서 과학을 바라본다. 하지만 우리는 핵무기도 과학기술자 집단의 자율적 의사결정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포용된 생명현상

왜 생물학자들은 배아줄기세포를 얻기 위해 체세포 핵치환법이라는 무식한 방법을 사용할까? 그들이 핵 속의 프로그래밍 및 프로그램의 발현 과정을 완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얻는 현재의 방법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생명의 정확한 원리를 모른 채 죽은 사람을 살리려고 번개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가 꿈이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포기한 마리 셸리(Mary Shelley)가 쓴 작품이다. 번개는 갈바니즘(Galvanism)을 상징한다. 갈바니는 개구리 뒷다리에 전기적 충격을 가하면 다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한 인물이다. 갈바니즘은 전기화학적 과정과 생리적 과정이 동일한 힘에 근거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고, 이 생각은 후에 대륙의 에너지일원론으로 발전한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번개를 이용하는 것은 다양한 현상에 공통된 힘을 상징한다. 낭만적인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 소설이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 반대론을 반영한다고 여긴다. 소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비극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낭만적인 사람들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프랑켄슈타인 소설 속에 담긴 자연주의이다. 초자연적인 것에 호소하지 않고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자연주의, 그 중에서도 문학의 자연주의이가 바로 그것이다.

문학의 자연주의는 19세기 초 실재주의의 확장이다. 자연을 신비와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만을 예술적인 관조로 생각했던 낭만주의에 반발해 일어난 운동이 문학의 실재주의이며, 실재주의자들은 낭만주의의 귀족적인 삶이 아니라 중산층의 애환을 묘사하려고 했다. 문학의 자연주의자는 다윈의 영향아래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라고 여겼다. 문학의 자연주의자들이 다윈 진화론을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헉슬리의 적자생존에 의한 진보를 다윈 진화론의 핵심으로 잘못 이해했고 물리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버리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문학의 이러한 자연주의를 규정한 인물은 에밀 졸라였다. 문학의 자연주의는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19세기 초부터 그런 경향을 띤 소설들이 나왔다. 마리 셸리가 1818년 꿈에서 영감을 얻어 쓴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소설을 대표한다.

문학의 자연주의 계열의 많은 소설은 비극적 요소를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켄슈타인도 마찬가지다. 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허구인 자유의지를 추구하는 인간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서양 문학의 전통은 장자적 해소, 불교적 해탈 혹은 모르는 것에 대한 침묵의 전통이 약하다. 자연의 산물로서 인간을 인정하는 것 혹은 인간 속에 담긴 자연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은 서양 전통 속에서 비극을 탄생시키는 모태가 된다. 우리가 프랑켄슈타인 소설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읽는다면, 그것은 그 시대 서양 문화권이 겪은 경험을 보여주는 것일 뿐 무조건 과학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죽은 인간을 되살리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의 상징이 아니다. 문학의 자연주의에 속하는 작품으로서 프랑켄슈타인 소설은 신 존재를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 중심의 전통이 인간을 너무나 위대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신을 제거했을 때 인간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학적 시각이 바탕이 되어 연구윤리가 논의돼야

프랑켄슈타인 소설은 죽은 자를 되살려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지만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는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질병의 치료와 관련된다. 모든 것에는 부작용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배아줄기세포연구의 부작용이 과연 인간 복제일까?

치료용 배아복제는 이론적으로 인간 복제의 전 단계가 되지만, 과연 어느 과학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인간 복제를 하겠는가. 당신이 과학자라고 생각하고 실리를 따져보기 바란다. 인간 복제를 하려면 체세포 핵치환법에 의해 얻은 배아를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켜야 한다. 그런데 과학자인 당신은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복제 인간을 만들기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잘 안다. 게다가 당신이 복제 인간을 만들면 노벨상을 받는가? 절대 아니다. 상식적인 과학자는 치료를 위해 인간 배아를 얻을지언정 절대 인간을 복제하지 않는다. 물론 당신이 악명 속에서 쾌감을 느끼는 미친 과학자라면 다르겠다. 만화영화 로봇 태권브이를 보아도 적의 숨은 우두머리는 미친 과학자이다. 하지만 이런 미친 과학자를 견제하는 집단 또한 과학자 집단이라는 의미가 만화영화 속에 반영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느 집단에나 미친 인간은 있기 마련이고 대부분은 상식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미친 가상의 과학자 한 명 때문에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를 무조건 막아야 할까? 그렇다면 그렇게 양심적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황당한 정치인을 막지 못할까? 부시는 애국법이라는 황당한 법안을 만들려고 했고, 꽤 많은 철학자들 및 종교인들이 이에 찬성했다. 그러나 다수의 과학자는 애국법에 반대했다. 나는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 반대론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복제를 막기 위해서 그 연구를 막아야 한다는 반대론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위험성과 효율을 비교할 때 인간 복제의 위험성은 적다. 물론 위험성이 적어도 그것이 현실화되었을 때 인류의 생존에 치명적이라면, 그런 것은 막아야 한다. 잔인하게 말한다면, 중성미자탄 개발과 달리 미친 과학자 한 명에 의한 인간 복제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 반대 입장은 좀 더 과학적이고 그럴듯한 손익 계산서로 이루어져야 한다. 무차별한 인간 복제 위험성을 가지고 반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 반대론은 마치 교통사고가 날 수 있으니 절대 여행은 가지 말라는 충고와 비슷하다. 그것은 생존권 등 다른 권리를 짓누르는 무차별한 보편적 인권 개념을 깔고 있고, 종교인들은 이러한 논리와 함께 춤을 춘다. 독재 상황에서 개인의 권리를 말살 당해본 아픈 경험을 한 다수의 지식인들은 개인의 권리 침해를 추상적인 인권 침해로 해석한다. 그러다보니 진보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이 인권에 타격을 줄지 모르는 과학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현재 우리나라 생명윤리논쟁의 문제점

나는 과거 개인 홈페이지에서 황우석 교수가 어떻게 단 시간에 그 많은 난자를 구했는지에 대한 의심을 신문보다 먼저 피력했
다. 이 말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내가 무조건적인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 찬성론자라는 인상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내 입장
은 제한적 허용론이다. 사실 내게는 허용론이든 반대론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안타까운 점은 몇몇 소규모 집단에 의해 찬반론이 이끌리고 정치적 관심사에 의해 법률안이 채택된다는 것이다. 일부는 유네스코 결의안을 들먹이는데, 그 안에서도 배아줄기세포연구를 둘러 싼 많은 분과가 경쟁하면서 결의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아니다. 새로운 과학기술의 결과를 어디까지 사회에 허용할 것인가를 측정하는 전문 TA(Technical Assessment)기관이 단 한 곳도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파악한 사람이라면 소수 자문위원회 혹은 몇몇 유명 과학자가 과학기술의 방향을 좌지우지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결과를 놓고 생명윤리학회는 네이처에 항의했다가 다시 사이언스에 항의했다. 나는 이 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반대론을 펴려면 경사면 논쟁, 인간 복제의 위험성 혹은 인권 옹호론을 떠나서 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위험성 분석에 의한 논거를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 못한다면 생명공학기술에 의한 장미 빛 미래를 외치는 조잡한 논리에도 대항할 수 없다. 대중이 무식하다고 탓하기 전에, 대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런 조잡한 논리에 기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배아줄기세포문제를 떠나 진짜 엄청난 위험성을 내포한 과학기술을 막아야할 경우 도대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철학자 네이글(T. Nagel)의 도덕적 딜레마 하나를 들고 싶다. 학교버스 운전사가 시골길을 가다가 사고를 냈다. 아이들이 죽어간다. 운전사는 전화를 하기 위해 외딴 집을 방문한다. 집 주인인 할머니가 피 묻은 옷을 입은 운전사를 엽기적인 살인마로 착각하여 문을 닫아버렸다. 집 밖에는 손자가 혼자 놀고 있다. 어린 아이들을 살리려면 운전사는 그 손자가 비명을 지르도록 손가락 하나를 부러뜨려야 한다. 당신이 운전사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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