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물음] 5.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물음] 5.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 박이문 /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1999.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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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적 삶은 대부분 진짜 놀라움이나 진정한 감동이 없이 흘러간다. 철이 나면 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 보통 우리는 특별한 의식 없이 그냥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코를 킁킁거린다. 산이나 구름을 보거나 천둥소리와 TV 방송을 듣거나 구린내나 향수 냄새를 맡거나 해도 마찬가지다. 상대성 원리를 배울 때나 노자의 철학을 읽을 때, 장가 시집을 가거나 애를 낳거나 죽음을 당할 때도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은 모든 상황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고 물리적으로 그냥 반응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리 팔팔하게 활동하고 아무리 떠들며 다녀도 마찬가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모든 그대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자명하다.

그러나 정말 잠을 깨서 살아나고, 정말 눈을 떠서 사물을 보고, 정말 귀를 기울여서 소리를 듣고, 정말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무엇인가에 대해 절실한 느낌을 갖고, 정말 머리를 써서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이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쳐올 수 있다. 이 때 산은 산으로 보이지 않고, 방송소리는 방송소리로 들리지 않고, 구린내는 구린내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전의 삶과 죽음이 아니고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며, 산은 산이 아니며, 물은 물이 아니고, 그 아무 것도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자명하지도 않게 된다. 나 자신이 알 수 없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바뀌고 한없이 이상해지며 느끼고 생각할수록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놀랍고 신기하다.

이제 나는 잠을 깬다. 처음으로 나는 산과 바다, 사람과 동물, 삶과 죽음, 내 자신과 남들, 컴퓨터와 책상을 본다. 처음으로 나는 바람과 물, 구름과 새들의 노래 소리, 나 이외의 사람들, 동물들, 초목들, 현상들, 사물들의 언어를 듣는다. 처음으로 나는 꽃과 쓰레기, 인간과 동물, 산과 바다, 땅과 하늘, 달과 별들의 냄새와 향기를 맡는다. 처음으로 나는 모든 것들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고, 흐뭇한 희열감을 체험한다. 나는 비로소 존재하고 비로소 살아난다.

산과 나무와 동물이 있다는 사실, 부모가 있고 내가 그 부모들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내가 존재하고 성장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꽃과 한 폭의 그림이 아름답다는 사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한다는 사실, 나나 네가 큰소리도 치고 고상한 말들을 하다가도 어느 연령이 되면 개나 돼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잡히고 몇몇 특별한 사람들을 빼놓고는 모두 그런 짓을 한다는 사실, 부모가 죽고 때가 되면 나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 인간이 한편으로는 자연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간과 싸우면서 긴 역사를 거쳐서 살아 남아 문명을 일궈 왔다는 사실, 내가 닭이나 돼지나 소를 잡아먹는다는 사실, 풀을 먹고사는 메뚜기를 개구리가 잡아먹고 그런 개구리를 뱀이 먹고산다는 사실, 모든 생물이 교배를 통해서 번식한다는 사실, 산과 바다, 식물과 동물이 살아 있다는 사실, 무엇인가의 존재가 보이고, 무엇인가의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 그러한 것에 대한 느낌*감동*생각이 있다는 사실, 지구*달*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우주가 있다는 사실, 자연현상이 정확하고 엄밀한 수학적 언어로 재현될 수 있는 과학적 법칙이 있다는 사실, 아니 라이프니쯔와 하이데거의 말대로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었을 텐데도 도대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찌 놀랍고 경이롭고 신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어쨌든 한 차원 높은 차원에서 그 대답이 보여주는 사실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물음이 다시금 제기될 때 모든 것은 더욱 경이롭고 신비로우면서 아름답고 당혹스러우면서도 황홀하다.

의식하고, 느끼고, 감동하는 모든 것이 경이로운 것은 이 경험이 나에게는 처음이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이 신비로운 것은 그 경험 대상이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떤 질서와 조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황홀한 것은 그 존재, 그 존재의 질서와 조화가 다같이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있는 어떤 요청을 충족시켜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어째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가. 지금까지 나는 산과 바다가 있고, 동물과 인간이 있고, 아버지와 자식이 있으며, 탄생과 죽음이 있다는 사실, 내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고, 새가 버러지를 찍어 먹고,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사실에 한번도 놀래본 적이 없었는가. 지금 나는 처음으로 이러한 놀라움을 경험한다.

인류가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존재의 기원과 목적, 우주의 구조와 운명의 원칙, 사물현상의 속성과 법칙, 수많은 개별적 존재나 현상들의 인과적 관계, 인식에 있어서의 의식과 그 대상의 논리적 관계, 인간과 동물, 나와 너의 존재 원인이나 이유, 도덕적 혹은 미학적 경험과 가치에 대한 설명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과학적 이론도 위와 같은 사실, 현상 그리고 경험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지금 나는 더욱 모든 존재, 현상, 경험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투명하게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무질서한 혼돈 같아 보인다. 그러나 경이롭고 신비로운 모든 존재, 현상 그리고 경험 속에서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이 막연하게나마 전제하거나 주장하는 것들 중에서 어떤 질서와 조화를 피부로 직관한다. 그러기에 나는 언뜻 보아 혼돈 자체만 같아 보이는 모든 것들 속에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질서를 느낀다.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어쩌면 그 가운데서 가장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어째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도대체 무엇인가가 있느냐의 물음 그 자체이며, 어쩌면 이 물음보다도 더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러한 물음을 던지는 인간, 인간의 의식, 인간의 지적 능력인 듯 하다. 그 원인이나 이유를 정확히 의식하거나 설명하거나 파악할 수 없지만 나는 이런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그냥 저절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적, 정서적, 미학적 충족감을 체험한다. 그러기에 지금 나는 모든 존재, 현상, 경험에서 황홀감에 도취된다.눈을 씻고 크게 떠서 사물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귀를 깨끗이 후비고 사물들의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코를 깔끔히 풀고 사물들의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기 때문이다. 피부로 깊이 처음으로 감동하고 지적으로 투명하게 처음으로 직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뜻에서 잠을 깨고 진정한 뜻에서 살아있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도 나의 머리, 눈, 귀, 코로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살아 왔다. 나는 공학박사, 대학교수, 큰 회사의 사장, 장관이 되었어도 나의 의식이나 감각, 아니 나 자신의 존재를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열심히 책, 돈, 권리만 보고 살아 왔다. 나는 백발이 되어 죽음이 가까운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자연, 우주, 그리고 존재와 그러한 것들의 궁극적 의미를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살아 왔다. 보통 우리는 이처럼 동물같이 살다가 죽거나 물건과 같이 존재하다가 없어진다. 코 밑 앞만 보느라 나무를 못 본 채 나무를 보았다고 착각하고, 잡음만 듣고도 음악을 들었다고 잘못 믿으며, 퀴퀴한 구린내만 맡고 치즈 냄새를 맡지 못하고서도 치즈 냄새를 좋아한다고 헛믿는다. 있는 대로 보지도 못하고, 소리나는 대로 듣지도 못하고, 냄새나는 대로 맡지 못하는 우리는 진정한 경이, 신비,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정말 느낌이 없이 존재하며, 느낌이 없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다. 잠을 깨고 살아나자.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세상이 나를 보며, 내가 귀를 청소하고 사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사물들이 또한 내게 귀를 기울인다. 코를 대고 존재의 체취를 맡으니 또한 존재가 코를 대고 나의 체취를 맡는다. 모든 것은 무한히 이상하고 신기하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맡으면 맡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렇다. 감동이 깊으면 깊은 만큼, 생각이 투명하면 투명한 만큼 한결 더 그렇다. 정말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하고 경이롭다.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새로 보자. 귀를 깨끗이 씻고 소리를 새로 듣자. 머리를 식혀 새로 생각해 보자. 세계는 지금과는 달리 무한히 신기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황홀한 감동의 원천, 투명한 인식의 대상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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