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대를 맞는 그대들에게
[기고]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대를 맞는 그대들에게
  • 정홍 / 전자교수, 음성 알고리즘 아키텍처
  • 승인 2003.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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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갈 길은 오로지 ‘창의력’ 밖에 없으니
유비쿼터스컴퓨팅 세상이 오고 있다고 한다. 10대 신성장동력산업에도 포함된 이 유비쿼터스컴퓨팅이란 무엇인가? 유비쿼터스(Ubiqitous)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언제, 어디서나 있는”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공학에서는 소위 3A를 뜻하는 것으로서 사용자가 시간(any time)과 장소(any place)와 장치(any device)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접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지난 1998년 미국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의 마크 와이저 소장이 처음 사용한 용어로 정보통신업계가 나가야 할 목표로 간주되고 있을 정도이다.

컴퓨터와 네트워크와 센서가 결합될 때

SoC(System on a Chip)가 발달하게 되어 사물에 컴퓨팅기능을 넣는 일은 점점 쉬운 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통신네트워크는 구축될 대로 구축되어 온 세상이 유무선으로 자유자재로 연결되며 GPS와 컨텐츠가 연동이 될 것이다.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가 휴대폰에 장착되고 모든 제품들이 RFID tag가 붙어 고유번호가 할당될 정도로 스마트센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세상의 모든 물건은 고유번호가 배정될 것이다. 독자들은 이렇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와 네트워크와 센서의 세가지가 결합하면 가공할 힘을 발휘하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고, 더구나 IT뿐만 아니라 BT NT CT RT ET까지 결합되는 ’BCEINRT’세상이 올 것이다.

인류는 약 50만년간 석기시대를 살아 온 것 같다. 그리고 약 1만년간 철기시대를 살아 왔고 현재는 ’규석기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정보화시대의 기본도구는 각종 반도체 칩들이다. 이 반도체 칩들은 컴퓨터, TV 디스플레이, 휴대폰 PDA,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캠코더 등에 두뇌로 들어가 있다. 이 반도체 칩들은 규석이란 돌로 만들어 진 것이다. 해리포터의 마법사의 돌이 바로 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돌에 각종 물질을 새겨 넣고 전기를 통하게함으로써 우리는 놀라운 마법의 기계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규석기 시대가 겨우 오십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 데 인간의 문명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지구상에는 이미 누적대수로 각각 10억대의 PC와 핸드폰이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규석기시대는 이제부터가 된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대에는 적어도 수천 배의 규석이 보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물질을 대체할 양자컴퓨터나 바이오컴퓨터가 나오기 까지는 규석기시대가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여기까지는 ‘Wonderful Word’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예수는 인간을 악한 존재로 보았고 석가는 인간을 탐욕스런 존재로 보았다. 어떤 이들은 인간들이 매트릭스와 같이 프로그램 된 어리석은 존재라고 보고 있다. 인간종에 속해 눈치보며 같이 섞여 살아야 하는 그로서는 인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험스럽고 모욕적인 주장일 것이다.

매일 일어나는 정치인이며 스포츠인이며 예술인이라는 이들의 활동상황을 보라. 공통적인 현상들은 탐욕 배반 원망 복수 애증 이런 것들이다. 어떤 패턴의 인간들이 어떤 패턴의 행동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틀림없이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 들고 그렇고 필자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면을 보면 성인들도 지극히 일부 현상을 본 것을 알 수 있고 어쩌면 바이러스와 같은 미물처럼 인간은 삼차원공간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21세기는 ‘멋진 신세계’인가

우리는 형이상학을 얘기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모두 형이하학인 것이다. 이런 한계성 현상을 구조적으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인간 비슷한 로보트조차 흉내 내려면 앞으로 300년 후나 가능하다고 한다. 기계적인 문제보다 지능적인 문제가 규명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시간이 해결해 줄 걸로 믿는 경향이 있다.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가 기능한 것은 이런 원리 때문이다. 석가는 이 현실에서 메타룰을 발견해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에는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라고 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오온(五蘊-물질적 현상, 감각 작용, 지각 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 작용)이 모두 공함을 알았고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 났다. 노자도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 했던가.

연구만 생각해도 그렇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 시대이래 모든 연구가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학에서는 더구나 편리를 도모하는 것이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유비쿼터스컴퓨팅이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집이고 오피스고 자동차고 심지어 이들 밖에서 활동할 때도 여러분들은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기본 기능인 Awareness나 Affective computing이나 Proactive computing이라는 기본 개념은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나 감시를 하고 마음 속에 있는 감정과 하고자 하는 의도까지 파악하고 미리 선수를 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미 국방성에서는 한 술 더 떠서 Life Log프로그램을 착수하고 있다. 조지 오웰이 예견한 대로 빅 브라더가 여러분을 모두 감시하는 Worderful World가 틀림없이 실현될 것이다. 과학자가 소설가의 아이디어를 따르는 것인지 소설가가 과학자의 공상을 따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설상가상 2199년이 되면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의 뇌를 매트릭스 프로그램해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고 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배신을 당했듯이 인간도 기계를 발명하고 배신을 당하고 거꾸로 이용당하는 미래가 온다는 것이다.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가 허구이면 좋으련만.

고대로부터 철학에서 학문들이 분리되어 나간 후 제각각 다른 길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인간화를 상실하는 심각한 폐해가 발생하고 있다. 정치는 권력을, 경제는 돈을, 체육은 기록을, 예술은 쾌락을 위한 최적화 도구가 되어 버렸다. 공학은 비인간화를 추구하여 이제 어디로 나가게 될 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모두들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목표를 최적화하기 위해서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과 결합을 시도하려는 조그만 움직임도 있다. BCEINRT와 같이 학제간 융합이 공학내에 새로운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나 이런 융합은 공학 내에서만 국한되지 말고 인문학에 까지 확장되어 인간화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꿈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 희망과 비관적인 관점에서 얘기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기 위한 인센티브로서 희망이 없으면 안된다. 먼 과거나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좋지만 공자와 같이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다.

어느 현명한 학자가 말했듯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국가가 있는 것 같다: 창의기반국가와 응용기반국가 그리고 소비기반국가. 한국은 두 번 째 부류에 속해서 창의기반국가에서 등록해 놓은 지적재산권을 사다가 응용제품을 만들어 소비기반국가에 수출한다. 퀄컴의 아이디어를 사와서 이루어 놓은 휴대폰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지능기반국가는 창의력을 바탕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아이디어를 창출해 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OS를 장악하고 있고 인텔은 컴퓨터를 장악하고 있으며 퀄컴은 휴대폰을 장악하고 있다.

다행히도 응용할 줄도 모르는 국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기회도 잠시가 아닌가 싶다. 응용기반국가로서의 지위는 점점 잠식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인도와 같은 소비기반국가들이 놀라운 속도로 지위를 향상시키고 있다.

‘창의력이 힘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갈 길은 오로지 창의력 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옛말에 “지식이 힘이다”라고 했는데 시대착오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창의력이 힘이다”라고 해야 한다. 50년전 컴퓨터가 등장하므로써 인간은 컴퓨터에게 지식의 소유권을 넘겨 주었다. 인간이 기계보다 더 나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 창의력이다. 적어도 수백년 간은 인간과 같은 지능을 흉내낼 수 없기 때문에 창의력 배양에 중점을 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교육도 창의력을 키우도록 재정비되어야 한다.

공식을 가르쳐 주고 문제를 풀도록 숙제를 내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문제를 많이 푸는 행위는 연구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차라리 생각하고 문제를 내고 실험하고 다시 생각해서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수정하는 그런 방법론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방법이 있는데 이런 것을 가르쳐 줄 줄도 모르는 것이다.

이제 교육도 룰의 시대가 지나고 메타룰의 시대로 진화해야 할 것이다. 응용기반국가에서는 모든 지 양이 질을 우선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회다. 양의 연구중심이 아니라 질의 창의 중심시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이런 차원을 넘어 많은 원천기술이 나와 창의기반국가에 동참하는 그런 시대가 오길 바라고 포항공대가 많은 업적을 남기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