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 프리고진의 과학사상과 생애
[집중탐구] 프리고진의 과학사상과 생애
  • 김승환 / 물리 교수
  • 승인 2003.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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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과학혁명 촉발시킨 ‘열역학의 시인’

2003년 5월 28일, 197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자 ‘열역학의 시인’이라 불리던 벨기에의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이 세상을 떠났다. 열역학 뿐 아니라 과학 사상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 학자의 삶과 그 의미를 되짚어본다. <편집자주>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벨기에의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2003)은 비평형 통계역학자로서 수많은 저술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과학사상가이다. 프리고진의 과학사상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Order Out of Chaos)’라는 말이 잘 대변하고 있다. 그는 질서와 무질서, 평형과 비평형, 우연과 필연, 가역성과 비가역성의 관계를 이해하고, 비평형과 비가역성으로부터 질서의 근원과 시간의 화살을 찾고자 하였다.

시간의 화살 찾는 끝없는 탐구

프리고진은 저서와 한국 방문을 통하여 오래 전부터 많은 국내 물리학자, 화학자, 과학사상가들에게 폭넓게 영향력을 미쳐왔다. 특히 그의 저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는 국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김용운 고려대 명예 교수는 당시 이 책을 어렵게 구해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도올 김용옥, 고 조순탁 한국과학원 전 원장 등과 이 책을 공부하는 모임을 가졌고, 이 모임은 추후 ‘과학사상 연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사상과 저서의 번역 소개는 1985년 ‘신과학연구회’ 구성 등 국내의 ‘신과학’ 운동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필자도 미국 유학중인 1980년대 중반 그의 저서와 세계를 처음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겪고, 현재의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1997년 그를 포항공대 <아운강좌>에 초청하여 그와 함께 했던 며칠간은 나를 비롯한 포항공대 참석자들에게 큰 지적 감동의 순간이었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혁명 발발 직전인 1917년 1월 25일 항공기사인 아버지와 모스크바 음악원출신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기에 휘말려 가족을 따라 리투아니아, 베를린을 전전하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 정착했다. 전쟁으로 얼룩진 유럽에서의 불안 속에서도 어머니 줄리아의 철저한 자녀 교육하에서 어린 프리고진은 피아니스트로의 꿈을 키웠다. 그는 아테네 중학교에 들어간 후 고전과 고고학 문학 및 철학 서적을 섭렵하였는데 특히 ‘흐름의 철학’인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은 성장하는 일리야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법률가의 길을 가기 위해 범죄 심리학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우연하게 화학에 대한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어, 브뤼셀 자유대학 화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평소 물리와 화학에서의 시간의 대칭성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던 중 대학 4학년 때 그는 시간의 특별한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열역학을 연구하기로 결정하고 드 동데르 교수 밑에서 열역학 연구를 수행하여 1941년 ‘비가역 현상에 관한 열역학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리고진은 1951년 이후 2003년 5월 타계할 때까지 브뤼셀 자유대학 교수와 오스틴 소재 미국 텍사스대학교의 물리 및 화학공학 석좌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1959년 브뤼셀 자유대학의 국제 솔베이 연구소, 1967년 미국 텍사스주립대학에 통계역학과 복잡계 연구센터를 각각 설립하여 소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평형 계에서의 비가역 과정의 열역학과 자연과학에서의 시간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비평형 열역학, 특히 소산구조 이론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1977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프리고진이 1979년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이사벨 스텐저스와 함께 저술한 ‘새로운 연합’은 곤충학에서부터 문학비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논쟁을 일으켜왔다. 이 책은 그저 평범한 또 하나의 책이 아니라 과학 그 자체를 변화시키고, 그 목적과 방법론, 인식론, 그리고 그 세계관을 다시 조명해보게 하는 지렛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 외 그는 ‘있음에서 됨으로’, ‘시간의 탄생’, ‘복잡성의 탐구’, ‘시간과 영원 사이’, ‘시간의 패러독스’, ‘카오스의 법칙’, ‘필연의 종말’ 등 수많은 책을 저술하여 그의 사상에 대한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는 일련의 책에서 뉴턴의 궤적, 결정론적 카오스에서 출발하여 양자 이론의 통일된 기술, 우주론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비가역성, 대폭발과 시간의 흐름을 확률론적 세계와 자기조직화에 기초한 일관된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조명하고 확실성의 종말이 새로운 과학과 문화의 창출의 시발점임을 주창하고 있다.

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친 방대한 지적 유산

프리고진은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개의 문화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웅이었다. 그의 패러다임은 라플라스의 극단적 기계론적 사고를 넘어 오늘날 사회적 변화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무질서, 불안정성, 다양성, 비평형성, 비선형성과 같은 실재적 현상들에 주의를 돌리는 학문간 영역을 넘나드는 포스트 모던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과학사상은 전체적으로 비결정론적, 유기체적, 생태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자연을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동양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프리고진은 존재 그 자체를 시간과 독립된 것이 아니라, 혼돈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본질이 발현된다고 보고 있으며, 동양 사상뿐만이 아니라 칸트, 헤겔,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등의 서구 철학에서 자신의 사상의 원류를 찾고 있다.

이제 프리고진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복잡성의 과학 유산은 모든 과학 기술 분야에서 인문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인 파장을 미치고 있다. 프리고진과 그가 촉발한 과학 혁명이 21세기 과학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하게 될 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