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전통과학] 음력, 천체의 움직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
[동아시아의 전통과학] 음력, 천체의 움직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
  • 이문규(인문사회학부 대우강사)
  • 승인 2000.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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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순 서
1. 전통의학 어떻게 볼 것인가
2. 시간의 역사 : 음력과 양력
3. 전통수학과 근대과학

“음력은 양력보다자연의 시간에 일치시키려는 원칙에 더 충실하다. 이 태도는 오늘날의 과학자도 기억할만한 것이 아닐까.”

시간과 달력

인류의 역사는 시간의 역사이다. 비록 잘 느낄 수는 없더라도, 우리의 모든 삶은 항상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다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표현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시계와 달력, 그리고 서기나 단기와 같은 연호는 시간을 표시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이다. 이 가운데 달력에 주목해보자.

우리는 음력과 양력이라는 두 가지 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이 음력 몇 일인지 아십니까?”,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생신 또는 기일을 양력으로 기억하고 있습니까?”와 같은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렇게 날짜를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우리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 나라에서 양력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이다. 일본(1873)보다는 조금 늦고 중국(1949)보다는 빠르다. 격동의 조선 말, 고종은 내우외환의 위기를 타개하고 조선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양력의 채택이다. 이에 따라 공식적인 날짜를 조선 개국 504년 11월 17일(음력 기준)에서 505년 1월 1일(양력 기준)로 바꾸었던 것이다.

양력의 역사


오늘날 사용되는 양력은 1582년 만들어진 그레고리력으로, 당시까지 사용되던 율리우스력(기원전 45년)의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것이다. 율리우스력은 1년의 길이를 365.25일로 하고 홀수 달은 31일 짝수 달은 30일로 하되, 마지막 달 2월(당시 한 해는 3월부터 시작했다)만은 평년 29일 윤년 30일로 정하였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황제가 되었을 때,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달의 이름을 섹스틸리스(Sextilis, 6번째 달이라는 뜻)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오늘날의 8월)로 바꾸고 길이도 31일로 늘리게 되었다. 그 결과 7, 8, 9월이 계속해서 큰 달이 되자 8월부터 교대로 큰 달, 작은 달이 되게 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모자란 하루를 2월에서 가져와 2월을 28일로 줄였다.

율리우스력에서 정한 1년의 길이 365.25일은 실제 태양의 공전주기(현대값 약 365.2422일, 당시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고 생각했다)보다 조금 크다. 따라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차이가 누적되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부활절을 계산하는 일이었다. 부활절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춘분을 지나 첫 번째 보름 이후의 첫 일요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오차가 누적되어 춘분이 점점 빨라지게 되고, 부활절을 일정한 기간에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역법을 고칠 필요가 생겼다. 결국 1582년 10월 4일의 다음날을 10월 15일로 정하고, 그 사이의 10일은 없애버렸다. 그리고 2월을 29일로 하는 윤년을 4년마다 두되, 100년마다 빼고, 다시 400년마다 넣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력이다. 기존의 달력을 버리고 새로운 달력을 사용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실제 그레고리력이 반포되었을 때,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쳤던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은 즉시 받아들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2달 가량 후, 12월 21일의 다음 날을 1월 1일로 정하여 새로운 달력을 수용하였다. 물론 그 해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는 없었다. 그리고 가톨릭 국가가 아니었던 영국은 1752년, 러시아는 1917년이 되어서야 그레고리력을 채택하게 된다.



음력의 특징과 변천
양력이 해의 운행을 보고 만든 것에 비해, 음력은 달의 운행을 보고 만든 달력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음력은 달의 운행뿐 아니라 해의 운행도 고려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음력의 정확한 명칭은 ‘태음태양력’이라고 해야 옳다. 음력에서는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있을 때를 매월 1일로 삼는다. 1달의 길이는 삭망월 29.53일에 맞추기 위해 29일 또는 30일로 정한다. 이렇게 1달의 길이와 초하루를 정하는 방법은 달의 운행에 따른 것이다.

우리의 음력은 해의 움직임 역시 중시하였다.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24절기이다. 달의 운행만을 고려한 달력은 해의 운행에 따른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이에 따라 해의 움직임을 살펴서 음력과는 별도로 24절기를 만들어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물론 해와 달을 동시에 고려하면, 그 주기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즉, 해의 운행주기는 약 365일이고, 달의 운행주기는 354일(29.5일×12개월)로 약 11일 정도의 차이가 난다. 윤달은 이런 차이를 보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19년에 7번이 들어간다.

동아시아의 역법에서는 해와 달 이외의 다른 행성들의 운동도 중시하였다. 이미 한나라 때의 유흠(劉歆, ?-기원후 23)이 만든 삼통력(三統曆)부터 5개의 행성들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관찰하여 역법에 담았다. 여기에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이 빠진 이유는 그것들이 18세기 이후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역법에서는 왜 직접 날짜를 표시하는 것과 관련이 없는 행성들의 움직임까지 관심을 두었을까? 이것은 달력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달력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약속을 정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당장 오늘을 1월 1일로 약속하고 그에 따라 생활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주일을 5일로 해도 되고, 일년을 10달이나 20달로 해도 상관 없다. 실제 양력에서 1달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정한 것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예에 속한다.

달력을 만드는 또 다른 방법은 자연의 시간, 구체적으로 천체의 주기적인 운동에 맞추는 방법이다. 회귀년으로 1년의 길이를 정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음력과 양력 모두 대체적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음력이 이 원칙에 보다 충실하여 천체운행에 대한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였다. 다음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이다. 유홍(劉洪, 약 129-210)의 건상력(乾象曆)에는 달의 공전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이 포함되었으며, 조충지(祖 之, 429-500)의 대명력(大明曆)에는 세차현상이 반영되었다. 유작(544-610)의 황극력(皇極曆)에서는 태양이 부등속으로 운행한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그 자세한 내용이 일행(一行, 683-727)의 대연력(大衍曆)에서 기술되었다. 또한 양충보(楊忠輔, 12세기 경)는 통천력(統天曆)에서 회귀년의 값을 365.2425일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제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세종시대 이순지(李純之, ?-1465)와 김담(金淡, 1416-1464) 등이 한양을 기준으로 만든 우리 고유의 역법 칠정산(七政算)은 곽수경(郭守敬, 1231-1316)과 왕순(王恂, 1235-1281) 등이 만든 수시력(授時曆)의 체계를 따른 것인데,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역법이었다.

음력을 만들고 사용했던 동아시아 사람들은 달력을 자연의 시간에 일치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음력은 임의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천체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살핀 결과물인 것이다. 5행성의 운행을 자세하게 포함시킨 것이나, 100여 종류의 많은 역법이 만들어진 이유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흔히 음력은 불합리하고 미신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음력은 천체의 움직임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달력이다. 음력을 만드는 태도는 오늘의 과학자도 기억할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