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전통과학] 근대과학 잉태못한 전통과학의 한계
[동아시아의 전통과학] 근대과학 잉태못한 전통과학의 한계
  • 이문규 / 인문사회학부 대우강사
  • 승인 2000.06.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주율 π

“…3.1415926과 3.1415927 사이에 있다. 정밀한 값(密率)은 366/113이고, 간단한 값(約率)은 22/7이다.”

이것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조충지(祖沖之, 429∼500)가 원주율에 대해 말한 값이다. 원주율 값을 얼마나 정확하게 계산했는가 하는 것이 수학의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양에서 원주율을 이 정도로 정확하게 계산하게 된 것이 천 년이 더 흐른 뒤의 일이라는 사실은 중국 수학을 다시 보게 만든다.

고대 중국인들 역시 초기에는 원주율의 값을 대략 3 정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사례에서 나타나듯, 보다 정밀한 원주율을 구하여 이용하기도 했다. 먼저 유흠(劉歆, ?∼23)은 곡식을 재는 원형의 청동용기(斛)를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원주율이 약 3.15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장형(張衡, 78∼139)은 구의 부피를 계산하면서 √10(≒3.1622)을, 해와 달의 운행을 설명하면서 92/29(≒3.1724)를 원주율의 값으로 제시하였다. 왕번(王蕃, 219∼257) 또한 혼의(渾儀)라는 천문기구를 설명하면서 원주율의 값을 142/45(≒3.1556)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한 원주율의 구체적인 계산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원주율 자체가 주된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 수학의 고전 <구장산술>(九章算術, 1세기 경)에 자세한 해설을 덧붙인 유휘(劉徽, 3세기 활동)는 ‘할원술’(割圓術)이라는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원주율을 계산했다. 그는 원에 내접하는 정 6각형에서 시작하여 점차 그 변의 수를 늘리면 마침내 정다각형의 면적과 원의 면적이 근사하게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유휘는 정 96각형과 정 192각형을 통해 원주율의 범위를 314*64/125<100π<314*169/625와 같이 얻었다. 나아가 정3072각형을 이용하여 원주율이 3927/1250(≒3.1416)이라고 계산하기도 하였다.

조충지가 원주율을 계산한 방법은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도 유휘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렇다면 원에 내접하는 정다각형의 변의 수가12288과 24576이었을 것이다. 아직 주산이나 필산(筆算)이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에서 실제 계산은 대나무나 동물의 뼈로 만든 산가지를 사용했을 것이니, 그 과정의 복잡함과 정교함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고차방정식과 천원술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의 수학은 대수학이 매우 발달되었다고 한다. 사실 <구장산술>에서부터 이미 1차, 2차 방정식은 물론이고 초보적인 3차 방정식도 다뤄지고 있다. 이후 진구소(秦九韶, 1202∼1261)는 <수서구장>(數書九章, 1247)에서 본격적으로 고차방정식의 해법을 탐구하여 10차 방정식을 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숫자방정식에 국한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고차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그의 방법 ‘정부개방술’(正負開方術)은 19세기 영국의 수학자 호너(W.G. Horner, 1736∼1837)에 의해서 얻어진 ‘호너법’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대수학의 특징이 부호를 사용하여 미지수를 표현하는 것이라 할 때, 그 역시 13세기 중국의 천원술(天元術)에서 시작되었다. 천원술이란 명칭은 미지수를 ‘元’이라는 부호로 표시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체적으로 일차항의 위치에 ‘元’이라고 표시하거나 상수항의 위치에 ‘太’라고 표시하여 주어진 방정식의 해를 구하였다. 이로부터 본격적인 대수학의 시대가 열리게 된 셈이다.

천원술과 관련하여 아래에서 소개할 두 명의 수학자는 기억할 만하다. 첫 번째는 천원술의 체계를 처음 세운 이야(李冶, 1192∼1279)이다. 그는 실용적인 색채가 강한 중국의 수학전통에서 ‘수학을 위한 수학책’ <측원해경>(測圓海鏡, 1248)을 통하여 대수학의 기초를 쌓았다. 뿐만 아니라 천원술의 내용을 종합 정리하고 실제 계산과정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익고연단>(益古演段, 1259)도 저술하였다.

두 번째는 <산학계몽>(算學啓蒙, 1299)과 <사원옥감>(四元玉鑒, 1303)을 지은 주세걸(朱世杰, 13∼14세기)이다. <사원옥감>은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1원의 천원술에서 시작하여 미지수가 4개(각각을 天, 地, 人, 物로 표시했다)인 고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등차급수의 합을 구하는 문제도 여럿 들어 있고, 소위 ‘파스칼의 삼각형’으로 알려진 이항계수를 보여주는 그림도 들어 있다.

<산학계몽>은 전문적인 수학책이었던 <사원옥감>과 달리 구구단과 같은 보다 대중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나라와 일본에 소개되어 수학 교재로도 널리 사용되었던 이 책은 재미있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명말(明末) 중국에서 갑자기 <산학계몽>이 사라졌다. 그래서 청(淸) 건륭(乾隆, 1736∼1795)시기에 이루어진 방대한 도서편찬 사업의 결과물인 <사고전서>(四庫全書, 무은재 도서관에도 있다)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이후 19세기 초 조선에서 펴낸 것을 얻어다 다시 간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수학과 근대과학

아인슈타인(Einstein, 1879∼1955)은 1953년 한 편지에서 서양과학의 발달은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형식논리 체계의 발명과 (르네상스 시기의) 체계적 실험에 의해 인과관계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의 발견에 기초하였다고 하면서, 중국에는 그런 요소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중국과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런 평가는 조셉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과 같은 중국과학사 연구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기하학적 사고가 없었다는 점은 흔히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전통과학의 한계로 지적되곤 한다.

물론 중국의 전통수학은 원주율이나 고차방정식 이외에도 여러 중요한 분야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하학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과연 전통과학이 근대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근대과학은 기하학의 토대 위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일까?

16, 17세기 유럽에서 근대과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중요한 요소로 기하학적 사고방식을 꼽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유럽의 근대과학은 기하학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가 기하학적 사고의 부재때문은 아니다. 과학의 역사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기하학적 사고방식과 근대과학의 탄생을 인과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연 비역사적인 태도이다. 마찬가지로 수학에서 기하학만을 강조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태도이다. 과거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열린 눈, 이것이 오늘 우리가 동아시아의 전통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한 가지 이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