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가치관 정립이 요구되는 21세기의 과학관
[과학문화,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가치관 정립이 요구되는 21세기의 과학관
  • 임경순 / 인문 교수
  • 승인 200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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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1세기 과학문화와 철학 사상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과학의 중요성이 증대되는만큼 과학문화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과학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4회에 걸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주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과학은 그 내용과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공히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우선 20세기 초반에는 물리과학 분야에서 혁명적 변화가 나타났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크, 보어, 슈뢰딩거, 파울리, 보른 등이 창안한 양자역학은 고전물리학에서 현대물리학으로 변화하는 혁명을 이끈 핵심 분야였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물리과학보다는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으로 대변되는 생명과학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물리과학 내에서도 초기에는 원자물리학이 중심을 이루다가 후반에 와서는 물성 및 생명 등 복잡한 체계를 다루는 과학 분야가 부상했다. 즉 20세기를 통해 줄곧 원자 물리학과 소립자 물리학의 그늘에 가려 성장하던 고체물리학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20세기 과학문화의 변화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과학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20세기 초 과학은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와는 달리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이라는 이미지가 많은 학자들에게 강하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에 과학이 지니는 객관성과 합리성에 대한 회의적 견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의 내용이나 방향에도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이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 점차로 학자들 사이에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과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과학 활동에 정부, 산업체, 일반 대중 등 다양한 사회적 이해 관계를 지닌 집단들이 개입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과학이 단지 합리적이고 실증적이며 논리적인 정합성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이외의 다양한 요소들이 과학 발전에 개입한다는 것이 보다 널리 받아들여졌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과학의 연구가 과학자 개인에 의한 개별적인 연구보다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함께 협동으로 연구하는 집단적인 연구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것도 과학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고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입자물리학 분야의 톱 쿼크의 발견 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몇몇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전체적인 일을 수행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춘 수많은 과학자들이 서로 협력해서 과학적 발견을 했던 것이다. 집단 연구의 보편화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고, 이 역시 과학관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과학의 사회적 성격이 부각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영향력이 증대되었고, 과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다소 퇴색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바탕이 되어 급기야 다원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과학관도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과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로 20세기 전반기를 통해서 급속히 성장했던 원자 물리학과 소립자 물리학이 주도하는 환원주의적인 과학관이 점차로 그 주도적인 지위를 상실해 가는 반면에, 복합적인 현상을 다루는 과학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전통적인 지식 분야들이 상호 결합되어 새로운 통합적인 과학 분야가 만들어지는 것이 더욱 빈번해졌다. 즉 각 학문 분야별 경계가 서로 모호해지는 새로운 학제간 연구가 크게 부상하고 있으며, 환원론적인 과학관이 쇠퇴하면서 각 부문별 자율성을 강조하는 과학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과학관에 있어서의 이런 변화는 20세기 후반에 풍미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맞물리면서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문화적 융합에 바탕을 두고 개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90년대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리성, 객관성, 환원주의, 위계적 통일 이념 등에 안주해 있던 전통적 지식 분야에 인식론적 다원주의와 다양성, 국소적 자율성, 문화의 혼합 및 창의성 등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인식론적 상대주의, 반과학적 신비주의, 무책임한 회의주의로 비화할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 지식인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문화적 혼합에 대한 개방성, 다양한 욕구에 대한 관용,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독창적 사고 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21세기 새로운 지식기반사회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과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천박한 세기말 사조가 아니라 21세기에 인류와 같이 살아갈 올바른 가치관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니는 바람직한 덕목은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가치관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상호 교류의 질서를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전통적 지식과 새로운 통합적 지식간의 긴장이 해소되며, 근대과학 수립 이후 우리의 중요한 가치관이 되어온 객관성, 합리성, 보편성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가 수용되는 새로운 가치관이 요구되고 있다.

정보화 물결이 거세지면서 컴퓨터, 창의성, 톡톡 튀는 개성으로 무장된 젊은 세대들은 기존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하던 구세대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문화를 창출해내었다. 하지만 최근 벤처 경기를 둘러싼 거품이 걷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성장하던 정보통신 분야가 위기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망각하고 지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즉 이제 사람들은 창의성, 다양성, 개성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바람직한 덕목들도 전통적인 가치관과 결합될 때에만이 보다 굳건한 미래의 가치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반환원주의가 부상되었으며, 전통적 지식 분야가 해체되고 초분야적인 학문 융합이 보편화되었다. 또한 탈경험주의 과학 사상이 퍼지면서 사회구성주의를 비롯한 과학사회학 내지 기술사회학적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과학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모든 흐름의 저변에는 과학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관심 고조와 대중의 과학에 대한 영향력 증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움직임들과 부분적으로 연결된 포스트모더니즘 과학관은 20세기 후반 마지막에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21세기를 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보다 굳건한 토대 위에 과학에 대한 건강한 관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