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신과학 어떻게 봐야 하나
[연재기획] 신과학 어떻게 봐야 하나
  • 강건일 / 과학 평론가
  • 승인 2002.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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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다운 가설의 비중을 강조한 과학일 뿐

대체의학으로 동물을 치료한다는 미국 전일론적 수의학 협회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전일론적 의학이 생명체의 방어 시스템을 보강하는 실질적 치료라는 점을 강조한 글이 실려 있다. 이들은 정통적 약물 치료는 증상을 없앨 뿐이라고 하며, 자동차의 빨갛게 들어온 연료경고등을 꺼지게 했다고 해서 차가 달릴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다.

이는 그릇된 유추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실제 차를 구르게 할 수 있는 주체는 보닛을 열어 연료 부족이라는 구체적 진단을 내리고 연료 보충이라는 목적에 적합한 처치 행위를 하는 환원론적 과학적 정비사이지 차의 외형을 살피기만 하는, 그렇게 모든 문제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전일론적 정비사는 아니다.

전일론적 생기론이란
전일론적 의학이 무엇인지, 인간 생명을 컴퓨터에 비유하여 본체에 해당하는 것이 몸이며 전기를 기(氣)로, 소프트웨어를 마음이라고 상상시키기도 한다. 현대 의학이 본체만을 다루기 때문에 전기나 소프트웨어 이상에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과학으로 밝혀낸 인간 생명의 모습과는 다르다. 인체 생리학은 에너지의 생성뿐만 아니라 정신도 뇌 신경세포의 발화에 기원을 둔 몸 과정의 일부이며 각 기관 사이의 연결과 마찬가지로 신경을 통해 몸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전일론은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사상이다. 과학의 전일론자는 부분적으로 쪼개는 환원론적 방식으로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주장이 온전한 생명이나 부분의 상관성 파악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경우 가설-연역적 과학적 방법의 틀 내에 어떠한 가설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연역하여 시험될 수 있는 예측성을 제시하고 검증을 통과한다면 새로운 과학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전일론자의 주장이 환원론적 과학으로 파악되지 않는 무엇이 전체에 포함돼 있다는 의미라면 앞서 컴퓨터의 본체로 비유한 몸을 작동시킨다는 기도 그렇고 이들이 생기론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동서양 할 것 없이 고대인의 체계에는 생기가 들어 있다. 그것은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 육체와 정신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실제 이 생기는 상식적 힘과 상상적 마술적 힘의 복합이기 때문에 과학 법칙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포함한다.

생기는 끈질기게 과학자의 머리에 남아 있었다. 물질로 환원돼 가는 생명에 대한 거부감 때문도 크지만 생명에 관한 한 아직 미지의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간격을 생기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생기론자와 기계론자 사이의 치열한 다툼 끝에 20세기로 들어올 때에야 생기론이 과학에서 제거됐으나 그 후 효소, 핵산 등 세포 구성성분으로 좁혀 들어간 생화학 연구 과정에 전일론적 철학 사상이 걸림돌이 됐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뉴에이지 반모던 세계의 비과학성
학자들은 뉴에이지가 1960년대 현상을 탈피하고 무엇인가 새롭고 신선한 기운을 추구하는 히피 유형의 분위기에서 시작됐었다고 분석한다. 물질주의와 규정적 속박 그리고 인간 갈등을 거부하는 이들은 베트남 전쟁 이후 명상, 잠재능력 개발, 전생 회상, 신비 의학 등을 통한 개인적 변화로 방향을 잡았다. 이에 대해 자기중심주의, 현실도피 등의 비판도 나왔으나 출판물과 매스컴 등의 상업주의가 편승하여 좀 더 많은 뉴에이지 추종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름이 뉴에이지일 뿐 이들의 믿음은 새로운 기운이 아니라 전통 오컬트(Occult)의 모습을 하고 있다. 뉴에이지와 함께 유행한 채널링에 의한 전생 회상은 우리의 무속적 점술과 다를 바 없다. 명상 수련에 의한 초월적 정신, 잠재능력 계발에 의한 초능력 달성은 전통 마술 세계에서 믿던 것이다. 대체 의학만 해도 인공적 물질주의에 환멸을 느낀 이들에게 전통 생기론적 자연요법은 매력일 수밖에 없다.

뉴에이지에는 반(反)모던 세계를 추구하는 기운이 들어 있다. 뉴에이지 작가의 공통적인 주제는 전통 세계의 생기론이다. 과학의 객관성과 방법론을 부정하는 곳에서 포스트모던 사상과의 연결도 보인다. 때문에 뉴에이지 사고를 객관성, 인과론과 예측성,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적 세계에서 탈피한 주관적, 믿음적, 자아중심적, 도덕적 세계를 지향하는, 한 마디로 반(反)과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뉴에이지 믿음에 과학의 옷을 입히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환경 철학만 해도, 이들은 육체와 정신,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적 본체론의 부정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이 세계가 한 개의 그물이라는 것을 상상시키기 위해서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직 증명돼야 할 가정을 포함시킨 양자론으로 원시 생기론적 물활론을 과학처럼 보이게 하지만 이를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희망적 사고에서 비롯된 과학
우리나라에 신과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뉴에이지 작가의 책이 소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하반기이다. 크게 신과학 철학과 신과학 기술 두 가지이다. 어떤 신과학 기술인지는, 1998년 국회에서 발의된 ‘정신과학진흥육성법안’에 나타나 있다. 이 법안은 폐기됐으나 피라미드 파워, 뇌파 통신, 기 치료 등 기 연구와 초감각적 지각(ESP)과 염력(PK) 등 정신적 초능력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이들 신과학 주제는 뉴에이지 유행과 더불어 대중 앞에 과학의 색채를 띄고 나타난 전통 생기론적 마술적 믿음과 유사하다. 반(反)과학을 비판하는 회의론자들(스켑틱스)에 의해 의사(擬似) 과학으로 규정된 것들이다. 비판적 사고를 가진 과학자라면 환상적 미스터리가 과학의 주제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아니라도 고대인의 사변적 생기와 그 체계를 과학적인 실체로 밝히겠다는 시도가 무모하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정신적 초능력 연구는 지난 100여 년 간 심령학자, 초심리학자의 과학적 연구 주제였다. 이들의 근본적인 연구 동기는 기술 개발이 아니라 물질주의적 과학에서 제외된 인간의 정신적 영적 양상을 되찾을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하나의 확증된 증거도 없으며 실패로 정리된 지금 새삼 이를 연구할 가치가 있을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신과학 주제는 공통적으로 희망적 사고에서 비롯된 탐구 과제라는 특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라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진리를 찾겠다는 희망이 연구의 추진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류의 희망은 진리가 희망대로 나타나기를 바라며 증거를 찾는 오류의 희망이다. 신과학을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계속될 영원의 탐구라고 비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분명 과학자는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에 문을 열어둬야 한다. 잘 확립된 원리와 상충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주장도 거절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과학 혁명은 탐구자가 모호하고, 신비적이고, 직관적인, 또는 형이상학적인 추정과 틀을 초월하여 의미있는 질문과 시험될 수 있는 가설로 움직일 때 일어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과학도 과학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과학적 방법론과 과학적 절차라는 룰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신과학을 소위 초정상 현상의 과학이 아니라 톱-다운 가설의 비중을 강조한 과학으로 정의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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