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6.15 남북공동선언 1년
집중탐구-6.15 남북공동선언 1년
  • 이제훈 / 한겨레신문 기자
  • 승인 2001.06.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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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자체에 의미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정상회담 개최가 확정된 뒤 방
북 직전까지 기회있을 때마다 이 말을 되풀이했다. 남쪽 정부
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정상회담을 준비했지만, 북쪽이 구체
적으로는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분단 반
세기 만의 첫 남북정상회담은 그렇게 안개속을 헤치듯 불투
명한 상태로 항해에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조
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자신의 갈 길은 ‘선군(先軍)혁명로
선’에 기반을 둔 ‘강성대국’건설이라고 주장했고, 그걸 노골적
으로 드러낸 구호가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말라”
(이 말은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96년 6월3일치에 보도된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이다)이었다.

무릇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했던가. 분단 반세
기 동안 철천지 원수처럼 지내온 남과 북 사이엔, 역설적으
로 처절했던 적대와 갈등의 강도만큼이나 화해와 협력, 평화
의 필요성이 절박했다.

아마도 오랜 세월 통일로 가는 과정의 ‘결정적 이정표’로 역사
책에 기록될 ‘6·15 남북공동선언’은 그 절박한 필요성에 현실
주의적으로 응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상회담 한돌에 즈
음한 지금 우리는 ‘남북공동선언’의 내용을 반추해봄으로써,
지난 한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생각해볼 수 있
다.

지금 우리가 공동선언을 뜯어보며 곰곰 생각해봐야 할 핵심
적인 내용은,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
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선언 1항에 담긴 ‘자주’의 진
정한 의미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남과 북이 모두 중시
하고 있는 72년 7·4공동성명의 자주조항은 ‘반외세 자주’였다
는 점이다. ‘반외세’를 떼어낸 것은 무엇보다 두 정상의 현실
주의적 접근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텍사스 총잡이’ 출신 조지 부시 대통령 취임 뒤 한반도 정세
가 후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선언 1항의 정신은 아무리 강
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남쪽이 미국의 힘에 짓눌려 한미동맹
만을 강조하는 것도, 북한이 ‘선 북미관계, 후 남북관계’식의
전통적 접근법을 취하는 것은 모두 선언 1항의 ‘자주’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약소국에 외교정책이란 없다”는 냉혹한 명
제를 염두에 둔다면, 지금 절실한 것은 말의 바른 뜻에서 ‘민
족공조’다. 자주에 관한 한 ‘북한이 옳고 남쪽은 문제’라는 인
식은 현실개척의 방향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 고정관념의 소
산일 뿐이다. 6월 정상회담은, 남과 북이 지난 반세기 동안 외
눈박이 괴물마냥 서로를 ‘미제의 식민지 괴뢰정권’과 ‘북한 공
산도배’들의 이적단체라는 비난이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는 점을 확인시켜줬음을 인정해야 한다. 동반자이자 적대관
계라는 남과 북의 이런 형용모순적 이중성은 92년 남북기본
합의서 전문의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
되는 특수관계”라는 규정이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공동선언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김정일 국
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는 약속
을 현실화하는 일이다. 첫 정상회담으로 터놓은 화해협력의
물꼬를 강으로 흐르게 해 저 넓은 평화와 통일의 바다로 나아
가게 할 결정적 전기가 2차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와 훌륭
한 성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선언에 명시되어 있는 ‘적절한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가겠다’고 만 할 뿐, 구체적 시기에 대
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예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전했듯이 아마도 김 위원장은 미국을 먼저 보고 있는 것일텐
데, 그렇다면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냉정하게 말해, 미국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할 의지도 관심도
별로 없다. ‘대화’야 하겠지만, 그게 클린턴 정부 때처럼 관계
정상화를 향해 줄달음치는 것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다
면, 문제의 돌파구 는 ‘북미관계 개선 뒤 남북관계’가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북미관계 견인’이라는 코페르니쿠스
적 발상의 전환에서 마련될 수도 있다. 그만큼 ‘자주’의 주체
적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남북은 지난 한해 한반도 안팎의 보수세력들이 ‘과속’을
걱정할 정도로 먼 길을 내달려왔다. 한해에 한번 하기도 어려
웠던 당국간 회담을 정상회담 뒤 모두 19차례나 했다. 지난
해 9월에만 6차례를 치렀다. 당국간 신뢰구축은 당연하게도
평화의 확대와 통일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까.

우선 남쪽을 생각해보자. 이른바 ‘북한 주적론’은 잊을 만하
면 한번씩 등장해 남북의 화해협력에 찬물을 끼얹고 합리적
토론을 가로막고 있다. 북쪽이 경의선 공사를 중단한데에는
바로 이 시대착오적인 ‘북한 주적론’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또 송두율 교수와 황태연 교수 등 올들어 잇달아 발생하고 있
는 시대착오적 ‘마녀사냥’의 버팀목도 바로 국가보안법의 이
적단체 규정과 같은 맥락인 ‘북한 주적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주적론을 제기하고 고집하는 게 대한민국 국군이 아
니라 일부 정치권과 언론의 냉전적 수구세력이라는 점이다.
정확히 말해, ‘북한 주적론’은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복적으로 외쳐지고 있는 것이다. ‘북
한 주적론’은 최악의 반인권-반민주주의 법률인 국가보안법
의 샴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에 새겨둘 부분은, 반대투쟁만으로 ‘북한 주적론’과 ‘국가
보안법’을 없앨 수 없다는 점이다. 냉전적 수구세력의 참주선
동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토양을 바꾸는 문제는
근본적일 뿐만 아니라 현시점에서 절실한 과제다.

현재의 남북관계는 예전과 달리 말뿐이아닌 상황 변화를 실
질적으로 이끌어내는데 필요한 부담을 짊어질 것을 요구하
고 있다. 남북간 화해협력 과정에서 현재의 ‘평화와 경제의
교환’ 패러다임이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
면, 남쪽엔 무엇보다 경제적 부담의 감당이, 북쪽엔 좀더 개
방적인 접근자세가 절실하다. 더 확대된 권리의 향유를 바란
다면, 마땅히 더 큰 부담을 감당할 의지와 능력의 배양이 필
요한 때다. 그래야만 현재의 ‘불안한 공존’을 ‘안정적 공존’과
‘상생의 공존’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