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은재의 편지 - 후학들에게 남기는 글
무은재의 편지 - 후학들에게 남기는 글
  • <포항공대신문 기획부>
  • 승인 2004.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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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적 가치 빚는 자부심으로..
제가 지곡을 떠난지도 어느덧 10년이군요. 온다간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갑작스레 정들었던 우리 학교 교정을 떠나온 지가 말입니다. 그 동안 제 빈자리를 대신해 우리 ‘포항공과대학교’를 이끌어 오신 동료교수, 동문, 직원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우리 학교의 모습도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우선, 개교 당시에 심은 나무들도 한층 더 우거졌습디다. 그리고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의 모습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보여 조금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아직도 변함없는 장소가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바로 ‘무은재 기념관’ 앞의 빈 좌대였습니다. 이 빈 좌대를 아직 채우지 못한 것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를 포함한 한국 기성 과학자들의 후학들이 혹여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책임지는 데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잃은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잠시 해봅니다. 게다가 제 살아 생전엔 듣도보도 못한 ‘이공계 기피현상’이라는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선배 과학자로서 그리고 포항공과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서 제 후학들에게 한마디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 편지에 담아 함께 실어보내려고 합니다.

포항공대인 여러분!

포항공과대학교는 사회적인 절실한 필요와 요구에 의해 태어난 학교입니다. 그 요구란 바로 과학기술 연구에 매진함으로써 사회적 부를 창출하여 공익의 가치를 쌓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과학기술을 연구한다는 것은 자연의 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좀더 인류사회에 유용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법을 찾아내는 여러 학문 중에서도 가장 창조적인 지적활동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이공계 인력들은 자신의 위치에 자부심을 가질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포항공과대학교의 설립배경이 가지는 이러한 특별한 의미는 다른 대학이 가지지 못한 우리학교만의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바야흐로 시대는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다른 사회·환경적 요인을 압도하여 세상을 이끌어가는 때입니다. 제가 생전에 강조하였던 유교적 가치는 바로 지금의 시대적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왜곡되지 않은 본래 모습의 유교적 가치와 과학이 만날 때 곧 사람됨과 인본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전세계의 과학기술계를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미국의 과학기술 연구 원동력은 이익추구를 근간으로 한 인간행동을 바탕으로 한 제도와 체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보다 실제적이고 합리적일 순 있겠지만 지나친 이익문제의 강조로 과학기술이 본래 추구해야 할 공익적 가치의 추구나 인본 가치의 완성이라는 의무를 무시할 수 있는 우려가 큽니다. 그리고 현재 생명윤리, 환경과 에너지 문제 등과 같이 사회의 이해 당사자들의 갈등이 첨예한 사안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해가는 현실에서 지금과 같은 개인의 이익추구 일변도인 연구문화 풍토에 온 세계의 운명을 맡기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유사 이래로 유학의 ‘仁義’를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연구문화 풍토라는 것이 지금과 같은 실용성을 갖춘 형태로 구축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포항공대인들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좁게는 자신의 연구활동에서 좀 더 넓게는 포항공대라는 과학기술의 요람에서 실현해 낸다면 그 결과는 그 희소가치만큼 빛을 발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것은 인류사적인 목표이자 성과가 될 것입니다.

지곡을 떠난 지 10년이나 되는 자가 후학들에게 너무도 큰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무척이나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항공대인들이 이런 제 충언을 마음 깊이 새기고 결국엔 그것을 이뤄내리라 믿습니다. 후학들의 입신양명을 빌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