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기념특집] 특별기고 - 포항공대 미래에 대한 제언
[개교기념특집] 특별기고 - 포항공대 미래에 대한 제언
  • 장수영 / 전자 교수
  • 승인 2003.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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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교수들이 있고 싶고, 오고 싶게 만들어야 좋은 대학
포항공대는 금년에 개교 17주년을 맞게 되었다. 1985년 7월4일에 서울에서 김호길 박사를 만나서 포항공대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던 때가 엊그제같이 생각되는데 그것은 이미 18년 전의 일이고 김호길 박사가 타계한지도 거의 10년이 되었다.

개교17년에 생각하는 우리대학 성공의 조건

포항공대가 빠른 시일 내에 국내 최고 수준의 대학으로 인정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대략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설립자이신 당시 박태준 포항제철회장께서 사심없이 훌륭한 이공대학을 만들어보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둘째, 초대학장 김호길 박사에게 대학에 관한 모든 권한을 일임하고 재단에서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김호길 학장은 재미시절부터 잘 알던 중진급 교수 여러분을 설득해서 아무 것도 없던 포항에 모셔올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젊은 우수한 학자들도 포항공대의 밝은 미래를 믿고 초빙에 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 제1회 입학생을 선발할 때 정원미달을 각오하고 학력고사 280점 이상인 학생에게만 응시자격을 주었고 우수학생 모집에 성공했던 것이다.

다섯째, 개교 이듬해에 바로 대학원을 개설해서 명실공히 연구중심, 대학원중심대학이 될 수 있었으며, 이는 개교 시에 이미 60여명의 교수를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섯째, 교수들이 모두 이기심을 버리고 학교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는데 예컨대 많은 이공계 교수들이 기꺼이 영어회화를 가르쳤고 기초수학도 담당했었다. 또한 대학홍보를 위해서 교수들이 기꺼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뒷받침이 있어 개교12년이 된 1998에는 홍콩의 아시아위크(Asia Week)지에서 포항공대를 아시아와 호주 최고의 이공계대학으로 선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3년 정치적 변혁기를 맞이하여 설립자는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고 재단과 대학과의 관계는 학교초기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따라서 포항공대가 초기와 같이 발전하려면 앞에서 언급한 조건들이 다시 만족된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역사적 교훈

불행히도 대학의 성공 역사를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므로 외국의 예를 살펴봄으로서 우리의 갈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의 조건에는 충분한 재정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대학의 지도자들이 우수한 교수를 초빙해올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독일대학에서 배우는 역사의 교훈

독일의 작은 도시 괴팅겐(Gottingen)에 있는 괴팅겐대학은 1736년에 하노바왕과 영국왕을 겸하고 있던 죠지2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세계 최고의 수학자라고 할 수 있는 가우스(Carl F. Gauss)가 48년간 괴팅겐대학 교수로 있었으며 그의 후계자인 디리흐레트(Dirichlet), 클라인(Felix Klein)등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클라인은 동프러시아의 벽지에 있는 쾨닉스베르그(Konigsberg)대학의 힐버트(David Hilbert 1862-1943)가 32세때인 1895년에 수학과 정교수로 모셔왔다. 힐버트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수학자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20세기에 풀어야 할 23개의 수학과제를 제안하였으며 이들 문제가 하나씩 해결될 때마다 수학계는 흥분하였다. 이중에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도 있다.

힐버트는 35년간 괴팅겐대학에서 있으면서 69명의 박사를 길러냈는데 그중에는 오토 불르멘탈(Otto Blumthal),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에어하르트 슈미트(Erhard Schmidt), 리햐드 쿠란트(Richard Courant), 막스 보른(Max Born)과 막스 덴(Max Dehn)등이 있다.

또한 물리학에는 1920년대에 막스 보른, 제임스 후랑크(James Franck), 로베르트 폴(Robert Pohl) 같은 대학자들이 있었으며 괴팅겐대학에서 공부한 하이젠베르그(W. Heisenberg)는 그곳에서 1925년에 양자역학을 창시하였다. 오펜하이머(R. Oppenheimer), 바이스코프(V. Weisskopf), 괴퍼트마이어(M. Goppert-Mayer), 요르단(P. Jordan), 델 뷔릭(M. Delbruck)등도 모두 괴팅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다.

1920년대 초까지 괴팅겐대학은 코펜하겐, 뮌헨, 취리히, 켐브리지와 함께 물리학 연구의 중심지였다. 디락(D.A.M. Dirac), 비그너(E. Wigner), 페르미(E. Fermi), 콘든(E.U. Condon), 노이만(J. Neumann)같은 외국인 학자들도 괴팅겐을 방문해서 연구를 했다. 파울리(W. Pauli)는 6개월간 막스보른의 조수로 있었고 함부르크대학의 강사와 부교수로 있다가 28세 때인 1928년에 스위스국립공과대학(E.T.H)의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하이젠베르그는 만26세 때인 1927년에 라이프치히대학의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디락은 24세때인 1926년에 켐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28년에는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완성하였으며 30세때인 1932년에는 한때 뉴톤이 차지하고 있던 루카시안석좌교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3년에는 슈뢰딩거(E. Schrodinger)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20대에 성공한 하이젠베르그, 파울리, 디락과 달리 슈뢰딩거는 39세때 파동역학을 발표하였으며 40세때인 1927년에는 막스플랑크(M. Planck)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1930년대초까지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다시 유럽 특히 독일에 가서 1-2년씩 연구를 하고 귀국해야 큰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도 교수들은 타대학에 가서 세미나발표를 자주 했는데 예산이 넉넉하지 못해서 호텔에서 묵는 대신 초청자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독일학문의 전성시대는 1933년 히틀러의 등장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막스 보른은 영국으로, 제임스 후랑크는 미국으로, 슈뢰딩거는 아일랜드로 가게 되었고 부인이 유태인이었던 페르미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수많은 과학자를 타국에 빼앗기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괴팅겐대학이 가장 치명타를 입었다.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면 그 대학은 명성을 누리게 되고 그렇치 못하면 보통대학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파격이 필요하다- 미국의 예

1887년에 창설된 클라크대학(Clark University)은 마이켈슨(A.A. Michelson)을 포함해서 우수한 교수들을 많이 확보해서 야심찬 출발을 하였으나 1891년에 시카고대학이 창설되면서 우수한 교수들을 시카고에 빼앗기게 됨에 따라 미국 물리학회 창설자인 웹스터(A.G. Webster)교수는 1923년에 자살하고 지금은 학생수 3천명 정도의 작은 대학으로 전락하였다.

콜럼비아대학의 라비(I.I. Rabi)교수는 1929년부터 38년간 재직하면서 콜럼비아대학 물리학과를 세계최고수준으로 만들었다. 그는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해서 1937년에는 쿠쉬(P. Kusch), 1938년에는 램(W. Lamb), 1948년에는 타운스(C.H. Townes), 1956년에는 리(T.D. Lee)를 콜럼비아대학으로 모셔왔으며 이들이 모두 후에 노벨상을 받았다. 1944년에 노벨상을 받은 라비는 노만 램지(Norman Ramsey), 슈빙거(J. Schwinger), 마틴 펠(M. Perl)같은 제자들을 콜럼비아에서 길러냈다. 라비는 고등학교 재학생인 슈빙거를 콜럼비아에 입학시켜서 21세때 박사학위를 받게 하였다.

콜럼비아대학 물리학과에서 학위를 받았거나 교수로 재직한 사람중에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사람은 18명이나 된다. 그러나 라비가 타계한 1988년 이후 콜럼비아대학 물리학과는 과거의 명성을 다시 찾지 못하고 있다.

1968년 노벨상 수상자인 유진 비그너(E. Wigner)는 1936년에 프린스톤대학에서 정년보장을 받지 못하고 위스콘신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38년에 다시 프린스톤 대학 정교수에 임명되었다. 결국 비그너의 능력을 인정한 당시 프린스톤대학 지도자들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1951년생인 에드워드 위튼(Edward Witten)은 1975년에 프린스톤대학 물리학과 그로쓰(David Gross)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4년간 하바드대학 휄로우(Fellow)로 있다가 1980년에는 프린스톤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1년에는 프린스톤고등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90년에는 수학의 노벨상격인 필즈메달(Fields Medal)을 받았다.

만약 우리나라처럼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야만 정교수가 될 수 있었다면 위튼은 당장 정교수에 임명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포항공대가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하려면 현재제도처럼 복잡한 절차를 밟아서 교수임용이 되어서는 힘들 것이다. 미국 대학들처럼 학과주임교수의 권한을 많이 부여하는 대신 책임도 지게 해서 훌륭한 교수를 외부에서 많이 초빙해와야 될 것이다. 주임교수의 임기를 4년으로 연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처럼 다른 나라의 예에서 보듯 좋은 교수들이 떠나는 대학은 결코 세계적 대학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단은 총장에게 좀 더 많은 자율권을 주어야 하며 그대신 대학운영이 잘못될 경우에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한 모든 잘못을 총장에게만 돌리는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교수들도 대학창설 당시의 정신을 되살려서 이기심을 버리고 대학업무에 협조해야하며, 대학은 교수업적평가시 논문수에만 집착하지 말고 연구의 우수성을 판단하며 강의가 우수한 교수와 봉사정신이 강한 교수들에게도 응분의 대우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