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에 쓰는 편지] ‘집 떠나 10년, 이제사 아부지 마음 알 것 같심더’
[어버이날에 쓰는 편지] ‘집 떠나 10년, 이제사 아부지 마음 알 것 같심더’
  • 심상규/ 전자 박사과정
  • 승인 2001.05.0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 건강은 어떠세요. 식사는 하셨구요? 가끔 집에 전화를 걸면 아버지와 나의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밥 뭇나?’라고 묻는 것이 경상도 식의 인사법이라 하는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도 밥 먹었냐’라고 되물으시는 아버지와 나의 인사법에 다소 경상도 남자들의 무뚝뚝함이 배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겠다.

나는 집에 자주 전화를 하는 편은 아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포항에 짐을 풀어 놓기 시작했던 스무 살. 그 이후 옛 강산도 변해간다는 10년째에 들어서는 동안 시나브로 집에서 멀어지며 집에 소식을 전하는 일이 따라서 적어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라온 모습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 남매들은 자신의 문제를 집 안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며 자랐다. 단지, 우리 집은 그러했던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라는 어느 가사처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국민학교 1학년 때의 것이다. 그 이전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 형들, 누나들에 대한 것 뿐이다. 그 속에 빠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학교 가기 싫어하던 국민학교 1학년 아들을 마당의 빨래 장대로 쫓으시던 아버지. 그때의 아버지는 이미 장년을 넘어 중년이었지만, 아버지는 내 키가 자라고, 내 이마에 얇은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고, 내 코밑과 턱에 수염이 점점 더 굵어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어깨가 처져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난 설날, 부모님의 방에 같이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주 어렸을 적 이후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여지껏 자라오며 아버지와 나눴을 대화보다 훨씬 많은 말들 사이에 부자가 나란히 누웠다. 10대의 말.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형들이 그랬던 것처럼,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있는 집이 싫었다. 공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궁핍한 어린 시절을 안겨주는 무능함의 소유자로 보이는 아버지가, 내 생각을 이해하기엔 너무 고루한 삶을 산 것 같은 아버지가 늘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날의 내 아버지는 내 삶을 걱정하며, 나의 외로움을 토닥여 주며, 내 걱정거리를 열심히 들어 주었다. 나는 되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살펴 드릴 수 없는 것이 죄스러웠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마음이라도 편하게 사시면 좋을텐데, 지금까지 아버지가 자유롭지 못했던 까닭이 나였음을 안다. 손을 잡으며 아버지는 네가 언제 이렇게 컸냐며 목소리가 잦아 들었다. 못난 아들은 베개 위에 이유없이 흐르는 눈물을 묻었다. 깡마르고, 까칠함으로 뼈마디가 굵어진 손에 쌓여 더욱 하애 보여서 부끄러운 손을 빼며.

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말하지 못한다. 다만, 내가 그때의 아버지 자리에 있었다면 나 역시도 그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 여길 뿐이다. 담배 심부름 가는 것을 싫어하던 막내 아들 때문에 좋아하시던 담배를 끊고 나중에 대학 갈 때 보내주마 하고 보여주시던 담뱃값 통장, 당신 지갑을 비우면서도 남자는 지갑이 비어서는 안된다며 자는 아들의 지갑에 반듯한 새돈을 넣어주시던 아버지의 손. 당신의 훌륭한 손으로 키우신 아들은 참으로 부끄러운 손을 갖고 있습니다. 집을 나서 살아보면 가족을 알게 된다던 아버지의 말처럼 10년이나 객지 밥을 먹고서 이제야 겨우 가족과 아버지의 그림자를 봅니다. 아버지, 내내 건강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