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가 바라는 포항공대
10 여년 전 일이 문득 생각난다. 학생들이 교내에서 데모를 하고 벽보를 부치고 하면서 어느 학생이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다” 하고 구호를 외치던 일이다. 또, 관선 이사진으로 운영되는 어느 대학은 ‘주인이 없어 교수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평을 들은 적도 있다.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대학의 주인이 누구여야 할지 결론이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학은 사회를 위하여 존재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제공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돕는 것이 존재 이유이다.
그러니까, 대학의 진정한 주인은 사회라 할 수 있고, 대학의 사업은 인재양성 사업과 지식개발 사업이다. 대학을 다스리는 이사회는 이 점을 명심하고, 사회를 위하여 그 대학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검토하고 계획을 세우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포항공대도 예외는 아니다.
지식개발 사업과 인재양성 사업
대학의 참된 재산은 전문 지식이며 이것이 사회에 봉사하는 밑천이 된다. 전문지식을 사용하여 옳은 사회 발전을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새 지식을 발견하고 기존지식을 합성하고 응용하는 일을 하는 곳이 대학이다. 무엇을 어느 정도 강조하느냐 하는 것은 각 대학마다 다를 수 있겠다. 포항공대에서는 인재양성 사업과 지식개발 사업 모두에서 수월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소수의 핵심적인 학과를 설치하여 분야를 제한하고, 학생 수도 소수로 제한하여 학생 대 교원 비율을 미국 일류 사립대학 수준으로 하였던 것이다. 포항공대는 이 두 사업에서 수월성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대학이라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수한 업적은 창의성을 포함하고, 높은 창의성은 깊이 있고 냉철한 고찰과 성찰의 되풀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포항공대 사람들이 얼마나 냉철한 성찰을 되풀이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 점에 관하여 각자 성찰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식개발 사업에서 수월성을 장려하려면 수월성을 재는 잣대가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논문의 숫자와 인용횟수로 업적의 수월성을 재는 것이 한국의 현실인 것 같다. 논문을 쓸만한 연구결과를 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며, 같은 분야 연구자들과 잘 사귀어 놓으면 몇 번 인용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니까, 논문의 수나 인용횟수는 어느 정도의 척도는 되나 수월성을 재는 적절한 척도는 아니다. 한 연구업적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내용이 그 분야 발전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는가로 결정된다. 어느 해, 미국의 어느 학과에서 1년에 논문 한편 정도 쓰는 교수에게 10편 정도 출판하는 교수보다 더 큰 봉급인상을 주었던 일이 있다. 전자는 항상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으로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기본문제에 관하여 논문을 써서 그 영향이 상당히 커 그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높은 평을 받고 있었다. 반면, 후자의 논문은 비교적 간단한 문제를 다루었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리 큰 환영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논문 한 편의 가치가 10편의 가치보다 더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논문은 많이 내고 있었으나 봉급인상을 덜 받은 교수도 설명을 들은 후에는 이 결론에 승복하였으며, 그 후에는 더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내려 노력하였다. 포항공대가 진정한 우수 연구 중심대학이 되려면, 교수의 연구 업적 평가를 어떤 잣대로 측정할 것인지 깊이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연구 업적 뿐 아니라 다른 업적의 평가에 있어서도 그렇다.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쳤느냐 혹은 끼칠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따져야 할 것이다.
인재양성 사업에서 수월성을 추구하는 일은, 사회의 장래를 위하여서는, 지식 개발사업에서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90년대에 들어서 정보화와 국제화가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하였으며, 모든 것이 매우 빨리 변화하고 복잡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일할 사람을 교육하는 내용이나 방법이 40년 전, 30년 전, 20년 전과 같아서는 안될 것이다. 대학 교육도 변화하고 질이 향상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대학교육에 관한 연구개발이 이루어져 포항공대 교육에 관한 전문 지식이 축적되고 적절히 응용되어야 한다. 간단한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다. 삼성전자에서 ‘우리는 예전에 하던 식으로 만들어 팔면 된다’ 하며 새 상품, 새 생산방법을 위한 연구개발을 하지않고 예전 상품을 예전식으로 만들어서 판다면 삼성전자회사가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포항공대는 다행히, 선진 외국보다는 늦었으나 한국에서는 비교적 일찍이 학생들을 위한 학습방법, 교수를 위한 교수법, 포항공대 학부교육에 관한 조사 등 교육에 관한 연구개발을 해왔다. 이런 연구개발과 적절한 응용은 포항공대 인재양성 사업, 즉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하는데 필수적이므로 계속 추진되어 교육의 질이 향상되기 바란다. 특히, 포항공대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에 관하여 훈련을 받은 적이 없음을 감안하면 더 심각해진다.
대학관리
사회에서 개혁이 가장 느린 곳이 대학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종신계약을 갖고 있는 교수들의 타성 때문이라고 하며 교수의 종신계약제도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학 구성원들이 대학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각자의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대학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사회를 위한 제도와 내용의 적절한 개혁을 포함한다. 이사회, 총장, 교수, 직원의 역할은 다르며 각기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한다. 인재양성 사업과 지식개발 사업을 수행하는데 있어 직접활동은 주로 교수들의 몫이다. 직원은 이들의 사업을 지원하고, 총장은 이사회에서 결정된 큰 테두리 속에서 운영을 총괄하고 책임을 진다. 이사회는 총장의 자문에 응하며 대학의 장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대학관리에서 뺄 수 없는 것은 충분한 대화이다. 대학에서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기 전에 구성원들이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주어야 하며, 많은 구성원들이 반대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면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대학 구성원들은 이를 수락하고 협력해야 한다. 민주사회에서 대학이 발전하려면 이사회와 총장의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사회와 총장은 동반자 관계
이사회와 총장은 일종의 동반자 관계를 갖고 있다. 총장은 이사회가 임명하지만, 대학에 관한 일반적, 구체적 지식의 소유자이며 대학운영 책임자이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대학을 위한 슬기로운 공헌을 이끌어 내도록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들은 포항공대에서 우수한 인재양성 사업과 지식개발 사업이 최고수준에 이르도록 관리하는데 있어서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들은 충분한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주요 사항에 관하여 합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포항공대 이사회는 대학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사회와 총장 사이에 적절한 동반자 관계가 이루어지기 바란다.
대학에서 50여년을 산 한 늙은이가 포항공대의 밝은 장래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에 몇 자 적어보았다. 포항공대는 한국사회, 인류사회를 위하여 우수한 인재양성 사업과 지식개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대학 구성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여, 포항공대에서 이루어진 연구업적이 한국사회와 인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포항공대에서 양성한 인재들이 훌륭한 전문가들이 되도록 해주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으리라 믿는다. 나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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