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나의 유학 생활
기고 - 나의 유학 생활
  • 김동언 / 물리교수
  • 승인 2002.03.2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동언 / 물리교수
학문하는 기쁨을 깨닫게 해준 프린스턴


새 학기가 시작된지도 벌써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필자가 유학하였던 미국 프린스턴대(Pinceton Univ.)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야기하고 싶고, 이것이 우리 포항공대 학생들이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질 지도자로서 부족함 없이 성장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바람에서 이 글을 쓴다.

나는 1982년부터 1991년까지 프린스턴에서 공부와 연구를 하며 머물렀다. 벌써 프린스턴을 떠난 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러다가 작년 초에 프린스턴을 다시 방문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 속담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고, 요사이의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르므로, 10년이면 강산이 서너 번 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지난 10년 동안 프린스턴은 외견상 거의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250년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10년은 매우 짧은 세월이리라. 새로운 건물들이 눈에 띄였지만, 내가 머물렀던 10년 동안의 익숙했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프린스턴은 우리나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졸업한 곳으로 우리와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소수정예 위주의 교육철학을 가지고, 기초학문 분야만을 강조하여 Law School, Medical School 등이 없어 학교가 작다. (학부생 4천여 명, 대학원 2천여 명 정도) 따라서 프린스턴을 졸업한 한국인은 다른 ‘Ivy league’ 대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아름다운 캠퍼스, 아름다운 기억들

영국 Oxford, Cambridge 대학을 모델로 하여 지은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웅장한 노송의 숲에 파묻혀 있다. 한 쪽 옆으로는 초록색 골프코스가 탁트인 공간을 제공하고,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좁은 시냇물은 캠퍼스를 감돌아 커다란 Carnegie lake에 이른다. 금강산의 변화가 무쌍하여 사계절마다 이름이 달리 붙여진 것처럼, 프린스턴의 사계절도 그에 못지 않게 변화가 무쌍하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로 불리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눈을 감고 그 때를 생각하면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부서지는 봄의 햇살을 받으며 연록색의 골프코스를 가로질러 강의를 들으러 뛰어가는 내 모습, 더운 여름날 Cleveland Tower에 올라가서 본 짙은 초록색 숲, 불타는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 찍던 아내와 나의 모습, 1미터쯤 쌓인 눈 속에서 차를 꺼내던 모습... 작년 초에 방문했을 때 프린스턴은 하얀 눈 속에 덮여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흥분이 된다. 내 청춘의 가장 핵심이 되던 때를 물리학으로 불사른 곳, 내가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더 성장한 곳, 프린스턴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지난 10년간 외견상으로 프린스턴은 변하지 않은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눈부신 발전과 변화를 겪었다. 학문적으로 보면 지난 10년간 7개의 노벨상이 프린스턴 재직 학자나 졸업자에게 주어졌다. (물리학상(’93, ’98), 화학상(’96), 생리학상(’95), 경제학상(’94, 2000), 문학상(’93)) 프린스턴은 전통적으로 예술과 과학(art & science)에만 치중을 하여 공대의 출발이 늦었다. 그러나 지금은 PMI(Princeton Materials Institute)와 POEM(Program in Opto-Electronic Materials)을 중심으로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13년을 봉직한 총장이 물러나고 여자 총장을 새로이 맞이하였다. - 3, 4년마다 총장을 바꾸는 한국 대학들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 1970년대에야 비로소 여자를 입학시킬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프린스턴으로서는 실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전 총장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21세기에 프린스턴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 가에 대한 개념 정립이었고, 새 총장은 그 일을 자기의 신명을 다해 추진해 갈 것이라고 여겨진다. 자기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그 물러날 때를 아는 것. 그 얼마나 멋있는가?

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프린스턴에 입학하게 되어 공부할 수 있었다. 플라즈마 물리학자로서의 청운의 꿈을 품고 대학을 갓 졸업하고 유학길에 오른 것이 1982년 여름이었다. 플라즈마 물리는 천체물리에서 발전되어 나왔고, 1960년대 플라즈마 물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투자가 이루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Matterhorn project’이다. 그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가 프린스턴 천문학과 교수인 Spitzer였다. 이로 인해 천문학과내에 플라즈마 물리 연구 분야가 있었다.

국가 프로젝트로 시작된 그 프로젝트는 프린스턴의 제 2 캠퍼스에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 연구소(Princeton Plasma Physics Laboratory, PPPL)를 설립하였고, PPPL은 학-연 연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지난 40여 년간 플라즈마 물리학의 우수한 연구 인력을 배출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플라즈마 연구의 요람으로서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오고 있다. 필자가 그러한 학-연의 협동 과정에서 교육을 받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다고 지금도 느끼고 있다.

자율성과 적성 강조되는 교육체계

우선 필자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대학원 졸업을 위한 이수 학점에 대한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석사,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필수 과목에 대한 이수 학점이 정하여져 있다. 이수학점이 정해져 있는 것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필자가 프린스턴에서 느낀 바는 엄격하게 우수한 학생을 선발한 만큼 그들의 능력을 일단 인정하고 신뢰하여, 알아서 공부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자율성이 매우 강조된다는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를 정하는데 필요한 요건은 입학 2년 이내에 예비 시험(Preliminary Examination)과 전공 시험(General Examination)을 통과하는 것이다. 어떤 과목을 듣고 어떻게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개설되는 강의를 자율적으로 취사 선택하여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요구되어진다.

준비가 된 학생이라면, 입학 첫 학기에 시험들을 모두 통과하고 바로 박사학위 논문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이제 대학에 막 입학하는 새내기들은 타율적으로 공부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스스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21세기의 지도자에게 더욱 요구되어지는 것은 그 스스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인데, 이것이 그 사람의 실력이며, 그 실력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사이 시청각 교육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학생들 스스로가 교과서를 읽고 이해하려는 자율적인 노력의 중요성이 간과되는 것 같아 안타깝게 느껴진다. 시청각 도구를 이용한 좋은 강의가 지식을 보다 쉽게 습득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결국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스스로의 자율적인 분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우리 포항공대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어떤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여를 하지 않으나, 학생이 자기의 적성에 맞게 방향을 잡는 데는 구체적 도움을 주려는 철학으로 교육이 진행된다. 대학원 1차년도에는 PPPL에 소속된 교수나 책임 연구원을 mentor로 삼아서 실험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적이었다. 또한 대학원 2차년도에는 이론 연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전공이 정해진 상태에서 이론과 실험 어느 쪽에 자기의 적성이 맞는지 발견하는 기회인 셈이다. 필자도 내 자신이 실험과 이론 어느 쪽을 더 잘 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대학교때 제대로 실험 경험을 쌓지 못하고 막연하게 실험을 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실험 연구에 참여하며 이론적으로나 말로는 쉬워 보이는 실험도 제대로 하려면 결코 만만치 않고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느낀 셈이었고, 그 가운데 미묘한 맛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론적 연구에서는 이러한 미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고, 실험 물리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실험 물리학자로서 실험을 해오며 고달플 때도 많았지만 재미가 있는 것은 아직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대학생들에게 대학 생활 동안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발견하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을 때 지치지 않으며, 창의적인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다.

지도자로서의 꿈을 갖고 학창시절 보내기를

자율성과 적성을 강조한 교육은 결국 홀로 설 수 있는 연구자, 지도자를 만들어 내는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라틴어로 써있는 프린스턴 박사 학위증에는 “스스로 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해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라고 박사를 규정하고 있다.

21세기에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단지 지배 구조의 윗 부분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지도자라 여겨질 수 없다. 해결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앞으로의 21세기를 이끌어갈 지도자라고 믿는다. 획일성이 강조되어온 우리의 사고 방식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고를 유연하게 갖추도록 바꾸어야 21세기에 한국을 선진국 대열에 당당하게 올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포항공대가 더 더욱 이런 지도자의 요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여러 학생들도 단지 학위증을 받고 졸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민족을 이끌어갈 지도자로서의 꿈을 가지고 준비하면서 이 캠퍼스를 불사르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