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제정 100주년과 포항공대
노벨상 제정 100주년과 포항공대
  • 유창모 / 물리 교수
  • 승인 2001.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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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은 노벨상이 제정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노벨상은 그 상이 지닌 높은 권위 때문에, 그 수상은 개인이나 소속 기관의 영광 뿐만 아니라, 국가 자부심과도 직결되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1945년 패전 후, 전쟁의 패배감에 무기력해진 일본국민에게 유가와의 노벨상 수상소식은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올해까지 2년 연속 일본의 노벨 화학상 수상은 90년도 들어와 버블 경제가 무너진 후 나날이 무기력해져 가는 경제 상황 속에서도, 일본 경제를 회생시켜줄 수 있는 일본의 과학기술이 아직도 건재한다는 자신감을 21세기를 시작하는 일본국민에게 심어주는 것 같다.

일본의 새로운 시작을 연 것은 노벨상 수상

노벨상은 자기 유산의 이익금을 물리학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화학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개선을 한 사람, 병리학 또는 의학에서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이상적 경향의 탁월한 문학 작품을 쓴 사람, 국가간 인류애를 증진시키거나, 전쟁을 줄이고 군비를 감축시키고, 국제평화회의를 주도한 사람을 선정하여 수여하라는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 12월 10일, 노벨이 죽은 지 5년째 되던 해부터 상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노벨이 수상자를 인류에 대한 실용적 기여를 한 사람으로 대상 분야를 제한하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수학 분야가 빠지게 되었고, 물리분야 내에서도 지구과학과 천문학은 수상에 있어서 계속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수학분야에서는 4년만에 한번씩, 그나마도 40세 이전의 업적에 대해서만 노벨상 보다 더 힘들게 수상하는 ‘Fields상’을 제정하였다. 1969년부터는 경제학상이 추가돼 현재는 6개 부문에 걸쳐 노벨상이 시상된다.

노벨상은 개인에 대한 수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노벨상은 최고의 과학자 모두에게 수여되지 않았다. 우수한 연구를 수행하고도 노벨상을 못 받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과학연구 자체가 공동연구의 형태를 띠면서, 거대과학의 연구에서는 한 연구에 약 100명 이상이 참가하는 집단적인 연구가 수행되고 있으나 노벨상은 한 연구에 대해 3인 이상에게 수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놓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노벨의 유언에 따라 업적이 탁월하더라도 병실에 누워 골골하거나 죽은 사람에게는 수여하지 않는다. 수상하는 연령도 20대부터 80대까지, 일년 전에 수행한 연구부터, 40년 전에 한 연구까지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자들의 하나하나를 보면 거의 모두가 수상 자격에 대하여 수긍이 가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업적이 과학의 지평선을 넓히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로가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노벨상에 관련된 이런 모든 면들이 지난 100년간 노벨상을 지상에서 가장 권위있고, 매력적인 상으로 만들어 왔다.

노벨상은 수상자들의 강한 상관관계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올해 노벨물리학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올해의 수상자는 미국 국립표준연구소에 근무하는 에릭 코넬(Eric Cornell, 39)과 콜로라도대학 교수인 칼 위만(Carl E. Wieman, 50), 그리고 볼프강 케털레(Wolfgang Ketterle, 43)이었다. 코넬과 위만은 지난 1995년 2000개의 루비듐 원자를 포획해 절대온도 20nK온도에서 순수한 양자 응집체로서 행동하는 새로운 물질을 만든 공로로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볼프강 케털레는 이와는 독립적으로 몇 달후 고주파 에너지 펄스를 이용해 포획한 나트륨 원자로 이뤄진 보즈-아인슈타인 응집체를 발견하였다. 이 새로운 물질의 제어기술은 고정밀 측정과 나노테크놀러지, 양자 컴퓨터 분야에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모두가 laser cooling을 연구하던 MIT의 프리차드(Pritchard)교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볼프강 케털레는 프리챠드 교수의 post-doc.이었으며, 코넬은 학부생이었고 위만은 2년간 연구팀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이렇듯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개 스승과 제자로 연구가 이어지는 강한 연대를 형성하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역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국가나 연구기관에서는 처음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암시한다. 노벨상 100년 동안 아시아 수상자는 전체 3% 정도에 불과하다.

노벨상의 ‘벽’ 어떻게 깰 것인가

우리도 2000년도 평화상 수상으로 노벨상의 벽은 일단 깨어졌다고 보이나,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필자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한국 최초의 수상자가 나온다면, 다른 학교보다도 포항공대에서 나와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노벨상에서 하나는 결국 여럿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포항공대 이외의 수상자가 발표된다면 포항공대에게는 견디기 힘든 악몽의 시작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떻게 하면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노벨상 수상을 단축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스타급 과학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든지, 중고등학교 과학교육을 창의적 형태로 바꿔야 한다든지, 우리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홍보를 강화한다든지, 입시제도를 바꿔본다든지 등등. 지난 20년 동안 아시아에서, 특히 한국에서의 과학 연구는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였다. sci 논문의 양적 팽창은 물론이거니와, 질적인 측면에서도 이제는 세계적 과학저널인 ‘Science’나 ‘Nature’에 한국에서 연구한 결과가 심심치 않게 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노벨상의 걸림돌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를 문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입시제도를 살펴보면,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해 나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번에 일본 교토대학 출신의 노요리 료지(野依良治. 63) 교수가 올해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일본인 수상자는 모두 10명으로 늘어났다. ‘Fields상’ 수상자까지 포함하면 13명이다. 그런데 자연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급(Field상 포함) 10명 중 7명이 교토대학 출신이다.

교토대학이 도쿄대학을 제치고 자연과학 분야에서 일본 최고의 과학 산실로 군림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기초 연구와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자유로운 학문적 풍토를 꼽을 수 있다. 교토대학이 도쿄에서 떨어져 있어 시대의 주류와는 다소 벗어나 독창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여유가 노벨상으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독창성은 노벨상 수상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노벨상에서는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의 발명 정신에 의거하여 처음부터 발명과 실험 물리학이 강조되게 되었다. 무선전신의 발명, 천연색 사진의 발명, 근년에는 의학용 CT, 나노구조 연구에 필수적인 STM의 발명 모두가 노벨상을 받았다.

지난 100년 동안 노벨상은 한계에 도전하여 연구를 성공시킨 사람들에게 주어져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 새로운 연구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장비나 아이디어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연구에 필요한 도구는 자체 개발해야 된다는 생각은 사실상 포항공대 설립 때부터 초대학장 고 김호길 박사께서 누누이 주장하던 말씀이었다. 이렇둣 한계에 도전하려는 정신이 자유로운 학문적 분위기와 함께 우리 대학의 학풍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도 노벨상 수상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