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오름돌] ‘소수정예’ 되돌아보기
[78 오름돌] ‘소수정예’ 되돌아보기
  • 황희성 기자
  • 승인 1970.01.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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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을 설명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근 입시 홍보 관련분야에서는 “1%의 인재를 모아 0.1%로 육성한다”는 문구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우리대학은 과거도, 현재도 ‘소수정예’를 지향하고 있다. 구성원의 숫자, 대학의 면적, 학과의 숫자 등 개교 초기부터 계획된 숫자상의 ‘적음’뿐 아니라, 한정된 종류의 인간-1%의 인재-을 받아들여 더욱 한정된 종류의 인간-0.1%의 인재-을 길러낸다는 질적 측면에서도 우리대학은 ‘소수정예’의 이름에 걸맞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다양성은 인재 풀의 한정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이는 긍정하기 힘든 질문이다. 전체 집단 100에서 5를 차지하는 특정 성향의 그룹은 1%의 인재를 모으는 우리대학에서는 1 이하로 줄어드는 것이다. 게다가 1%를 결정하는 척도가 입시 성적 한 가지뿐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줄어들 것이라 예상할 수도 있다.

이런 거친 방법의 접근은 물론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다. 한정된 사람들 속에서도 다양성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 실재로 우리대학 안에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수적인 약점에서 오는 사회적 감각의 둔화이다.

대학은 작은 사회다. 우리는 이곳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 고등학교와는 다른 스케일로 배운다. 나와 다른 사람의 소통을 몸으로 겪어가는 장을 제공할 때 비로소 대학은 고급지식 백화점 이상의 의미를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대학이 다양한 타인과의 접촉이 용이한 대학인가 하고 물어보면 긍정하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적다는 사실 만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수의 다양한 이들이 모여있을 경우에는 이들 사이의 빈번한 부딪힘이 깊고도 다양한 시각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우리대학에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왜 그럴까.

지난 학기 신문을 제작하면서 외부 대학의 모 교수에게 과학과 언론에 대해 인터뷰를 부탁했지만 거절 당한 일이 있다. 처음에는 “포항공대 교수님들 훌륭하신 분들 많이 계시잖습니까. 그분들이랑 이야기 하면 될 텐데요” 라고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혀왔지만, 계속해서 무리하게 부탁하자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연구만 잘하고 돈만 많이 따오면 뭐합니까. 자기 학생들이 학내에서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밖에 손 벌리고 있을 때까지 가만히 있는 교수들도 문젭니다.”

물론 학생들 사이의 학점을 중시하는 분위기, 대학 출발 자체에서 비롯하는 어쩔 수 없는 문제들도 사회감각 둔화에 한몫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게다가 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교수들의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리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대학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교수상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것이 뛰어난 연구능력과 세일즈 능력인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교수를 지식 소매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대학이 출발할 때부터 교수들에게 만능초인이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선별된 교수에게 막대한 지원을 퍼붓는다 해도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하루의 시간은 최대 24시간이다. 연구, 세일즈, 교육…
이 모든걸 혼자서 해내는 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르며, 또 이것을 모두 수행해내는 이를 설령 찾아낸다 하더라도 대학이 지속적으로 그러한 교수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사실 명확한 결론은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우리의 건학이념을 건드릴 수 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교 20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는 뒤를 돌아보고 앞을 생각할 시점에 왔다. 구성원 모두 다음의 질문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우리가 걸어온 길에 그림자는 없는가?” 그리고는 모여서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