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여덟 오름돌] 도발적인 도그마 선언을 기다린다
[일흔여덟 오름돌] 도발적인 도그마 선언을 기다린다
  • 문중선 기획부장
  • 승인 1999.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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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가치 거부한
‘도그마 95’

1995년 3월 13일 월요일. 우리에게 ‘킹덤’으로 널리 알려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토마스 빈터베르그, 크리스티안 레프링, 소렌 크라그 야콥슨과 함께 ‘도그마 95’라 불리는 약속을 선언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테크놀로지나 작가주의 등 영화의 순수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또한 영화잡지 광고에 났던 것처럼 “섹스는 일상에서 일어나므로 영화에 들어갈 수 있지만 살인은 우리가 살인하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므로 영화 장면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현재까지 <백치들>, <셀레브레이션>, <미후네의 마지막 노래>와 같은 작품들이 도그마 95에 입각해서 만들어졌다. <백치들>이 배우들의 노출을 꺼리지 않는 파격적인 영상을 보여 주었다면 <셀레브레이션>에서는 가족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묘사하였으며 <미후네의 마지막 노래>에서는 서정적인 영상으로 도그마 95 영화도 얼마든지 예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한다. 도그마 95 선언을 한 뒤 젊은 감독들은 그 선언 안에서 매우 개성이 살아 넘치는 방법으로 각각 영화를 촬영했던 것이다.

이들의 서약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쌓아온 ‘영화’ 자체에 대한 거부였다. 작가주의마저 배제해버리는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라스 폰 트리에가 매우 거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별로 무리도 아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은 가슴속에 젊음이 살아 있던 이들을 움직였다.


다음에는 누가?

이제 가을학기도 한 달 정도 남았다. 그리고 각 자치단체의 임기도 점차 끝나가고 있다. ‘동장 비리 의혹’ 또는 ‘기자회 폐지론’이 포스비에 돌며 비난받고있는 기숙사자치회도, ‘활성화’를 열광적으로 외치며 의욕을 보였던 동아리연합회도, ‘신 명예혁명’을 부르짖던 총학생회도, 그리고 각 학과의 학회도 모두 “다음에는 누가?”를 걱정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총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가 다음 대를 이끌 회장단을 찾고 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과감하게 자치단체에
봉사할 별을 기다리며

“축제가 재미없어요”라는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왜 그런지는 우리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① 지금까지 항상 일을 해오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축제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② 행사는 지금까지 하던 행사와 다르지 않다.
③ 새로운 것 없이 그전에 하던 것과 비슷하니 재미가
없다.
④ 집에 가거나 술이나 마신다. 축제가 끝난다.
⑤ 새 축제 준비기간이 다가온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핑계로 축제준비위원회에 새로 일하기를 바라는
사 람은 적다.
⑥ ①로 가서 다시 위 과정을 진행한다.


축제는 그 대표적인 예일 뿐이다. 강연회 준비나 학생복지에 대해 학교에 우리 입장을 알리는 일, 당연한 우리 권리를 주장하는 일 등 총학생회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해오던 사람들이 하다보니 새로운 생각을 찾기 힘들다.

마치 우리가 매일 같이 78 오름돌을 오르듯 위와 같은 무한 루프는 계속되었다. 위 루프를 깨고 싶은 사람은 없는가? 겁 없이 자치단체를 맡아 새 문화를 창조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가? 지금까지 일해온 자치단체를 싸그리 비판하여도 좋다. 선배들에게 반기를 드는 것도 좋다. ‘도그마 95’ 선언처럼 과감히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자치단체를 이끌 사람이 없다면 자치단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새로운 혜택’이나 ‘새로운 복지’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새로운 인물의 편견에 빠지지 않은 겁 없는 일 처리가 우리 자치단체를 살릴 수 있다. 그렇게 포항공대에서도 ‘도그마 99’를 선언하며 혜성처럼 과감하게 자치단체에서 봉사할 별을 기다려 본다.

도그마 95 선언문
나는 도그마 95에 따라 결정된 다음 서약을 따를 것을 맹세한다.

1. 촬영은 현지에서만 한다. 소도구나 세트를 가져오면 안 된
다. (만약 특별한 소도구가 필요하다면 이를 찾을 수 있는 장
소를 선택한다.)

2. 소리는 이미지와 먼 곳에서 만들면 안 된다. 이미지 또한 소
리와 먼 곳에서 만들면 안 된다. (음악이 촬영 장면에서 발생
한 것이 아니라면 삽입 될 수 없다.)

3. 핸드헬드 카메라를 써야만 한다. 손으로 할 수 있는 카메라
움직임이나 정지는 괜찮다. (카메라가 서있는 곳에서 필름을
만들면 안 된다. 촬영은 필름을 찍는 곳에서 해야 한다.)

4. 컬러 필름을 써야 한다. 특별한 조명을 쓰면 안 된다. (만약
노출에 빛이 너무 적다면 장면을 자르든지 카메라 옆에 램프
하나를 달아라.)

5. 광학적인 인공 작업과 필터를 금지한다.

6. 필름이 천박한 액션을 담으면 안 된다. (살인, 폭력과 같은 것
들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7. 시간과 지리적인 비약은 금지된다. (필름은 여기서 지금 찍
혀야 한다.)

8. 장르 영화는 받아들일 수 없다.

9. 필름 형식은 아카데미 35mm이다.

10. 감독은 크레딧에 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개인적 취향을 삼갈 것을 감독으로서 맹세한다. 나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보다 순간을 더 존중하는 만큼 ‘작품’을 만드는 것을 삼가한다. 내 궁극적 목적은 인물과 세팅에서 진실을 취하는 것이다. 미학적 취향이나 고려에 대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이렇게 할 것을 맹세한다.

따라서 나는 순결한 맹세를 한다.

코펜하겐, 1995년 3월 13일 월요일도그마 95를 대표하여

라스 폰 트리에
토마스 빈터베르그
크리스티안 레프링
소렌 크라그 야콥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