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동산에서] 나라 걱정 대학 걱정
[노벨동산에서] 나라 걱정 대학 걱정
  • 김영걸 / 화공 교수
  • 승인 2000.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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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각자가 자기 ‘장사’를 하는
구멍가게 위에 화려한 지붕을 씌운
건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1985년에 고 김호길 학장과 의기투합하여 50중반의 장년(壯年)으로 이 포항공대와 인연을 맺은 지 1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내 나이 일흔이 넘어 이 대학의 최고령 교수로서 정년을 3개월 남긴 오늘, 이 글이 아마도 우리 대학 신문이나 간행물에 현역교수로서는 마지막 투고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최근에 해마다 한 두어 번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왜 그런지 그렇게 우울하고 서글퍼진다. 우리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오래 전에 국적을 되찾고 이곳에서 여생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즐거워야 할 여생에 대해 걱정이 너무 많다. 나의 우울함 또는 걱정거리를 정리하여보면 첫째로 이 사회에 대한 우려이고 둘째로는 우리 대학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걱정이다.

우리 사회의 한편에서는 이 사회를 움직이는 소수의 소위 지도층(행정부나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이 판을 치고 있고 또다른 한편에는 이를 무기력하게 쳐다만 보는 양심과 양식(良識) 있는 다수의 국민들이 있다. 남의 나라들은 21세기를 향하여 재빠르게 앞으로 달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왠지 제자리걸음 또는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지구상의 다른 사회를 보면 물론 우리보다 못한 곳도 많지만 우리는 선두를 달리는 사회들과 비교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대로 가다가는 1990년대 초반에 선진국의 문턱 구경을 한번 한 것이 고작이고 아마도 멕시코나 타일랜드 정도의 중진국으로 내려앉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에는 우리 대학걱정을 안할 수 없다. 15년 전에 이 대학을 만들 때에는 한국에서의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온 세계가 알아주는 대학을 만들자는 패기와 포부를 가지고 시작을 한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현재 우리들 중에는 한국에서조차도 3위 정도를 유지하기가 고작이라고 하는 패배주의(defeatism)에 빠져있는 교수나 학생들이 상당수 있는 듯 하다.

실질(實質)보다도 허식(虛飾)을 더 중요시하는 우리의 문화적 장벽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우리의 강점(强點)을 살리지 못하고 남들이 정해놓은 틀 속에서 그 형식에 치우친 기준을 따라가면 바로 패배주의자들의 예측대로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우리 나라 최고의 질의 교육을 실천하고 이것을 남에게 알려 우리의 독자적인 표준형을 만들어야 우리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대학이 되는 것이다.

10여년 전에 과학기술원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에 주거를 둔 일부 교수들이 일주에 3일 내지 4일 대덕에 근무하기 시작한 것을 기억한다. 나는 이런 관행이 과기원의 교육의 질을 크게 낮출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이것이 심각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포항공대가 그저 괜찮은 직장을 초월해 세계적인 대학을 이루려면 우리 모두에게 희생이 요구된다. 우리대학이 교수 각자가 자기 ‘장사’를 하는 구멍가게 위에 화려한 지붕을 씌운 건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학이란 학자들의 공동체(community of scholars)이며 우리의 가장 큰 자산은 200여명의 우리 나라 최우수 학자들의 결집된 힘이다. 대학의 모든 주요 정책은 우리들의 심사숙고에 따라 결정되고 대학본부에게는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데 자율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소수의 교수들이 마음에 안든다고 하여 집행부를 계속 흔들어 본부가 그것을 방어하는데 정력을 많이 소비하면 대학의 장래를 위하여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이 소홀해지고 결국 우리 모두에게 큰 손해를 끼친다는 것을 공동체의 식구들이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또한 총장 이하 대학의 운영을 맡은 모든 사람들은 교수·학생·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하며 자기 능력을 최대로 계발할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무엇보다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 불필요하게 과중한 스트레스를 가하는 일은 생산적이 되지 못함을 이해해야 한다. 얼마 전에 대학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며 나라 걱정 못지 않게 이 대학의 앞날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이 한 늙은이의 기우(杞憂)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