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동산에서] 경쟁의 진실
[노벨동산에서] 경쟁의 진실
  • 남인식 / 화공 교수
  • 승인 2001.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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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인식 / 화공 교수
우리 모두는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기기 위해 혹은 지지 않기 위해 간혹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합법과 정의를 표면에 내세우는 가식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신사협정 하에서 이루어져야 되고 또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마 선진국과 우리 같이 마치 경쟁이 없어 선진국이 빨리 되지 않는다고 믿는 나라와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정해진 법칙들이 경쟁 중에 특정인을 위해 바뀌고 그때그때 순발력있게 적응하는 사람은 살아 남고 그렇지 못한 자는 낙오자로 남게 된다. 우리 같이 좁은 사회에서는 승리자와 패배자가 분명하고 그 수적인 면에서 패배자가 훨씬 많을 수 밖에 없는 선진국의 경쟁체제가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특히 모두 함께 어울리고 같이 힘을 합하는 것 보다 개인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이것이 모여 사회를 발전시키자는 그야 말로 ‘good will’로 시작된 경쟁이 오히려 사회 분열과 극단적인 이해집단의 양산 나아가서 경쟁보다는 공생만의 사회보다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소위 선의의 경쟁이 통용 되고 받아들여져 경쟁과 공생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지난 4개월 여의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의 두번째 갖는 ‘Sabbatical Leave’는 새로운 경쟁 체제를 느끼고 그 체제를 보다 발전시킴과 동시에 보완해 나가는 그들의 지혜를 보며 우리의 미성숙한 경쟁의 헛점을 재발견한다. 버클리의 가장 큰 경쟁은 가까이에 있는 작은 사립 명문대학인 스탠포드대학이다.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노벨상에서 미국을 이끄는 두개의 이념인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서 까지도 그렇다. 공화당정부에서는 스탠포드대 교수와 출신들이 대거 기용되어 그들의 철학을 시험하고 적용하며 민주당때는 버클리대 출신과 교수들이 경쟁에 앞장서며 그들의 경쟁을 즐기고 국민들은 그들의 역할과 이론을 확인한다. 이 모든 것이 신사협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서로의 마지막 선은 넘지 않고 경쟁을 발전의 동기로 삼고 있다.

마지막 선을 넘게 되면 제재를 가하고 사회에서 도태시키기 위해 모두가 나선다. 소위 ‘막가파’에 대한 대응을 ‘칼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걸 잘 아는 경쟁자들은 자기 자신의 주제 파악을 잘하고 진퇴를 확실히 한다. 패배자는 결과에 승복하고 경쟁의 승리자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경의를 표하고 이긴 자는 관용으로 패배자를 감싸고 같이 동반할 것을 권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복수의 칼날은 마음 속에 감추고 또 다른 경쟁을 위해 다음을 준비하고 분노가 경쟁의 게임을 망치고 막가파가 되어 사회에서 도태됨을 분명히 인식하고 다음 경쟁에 나선다. 물론 경쟁의 주관자는 경쟁 기간 동안 경쟁의 공정성을 최대한 유지하고 경쟁의 법칙을 기간 중에 바꾸거나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하며 결과의 승복을 전제로 한 경쟁을 시종일관 유도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불필요한 잡음은 물론 법정까지 가는 경우 뿐만 아니라 다음 경쟁을 시작내지는 주관을 할 수도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사회구조부터가 모두 설익은 경쟁에 요동치고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은 물론 중상모략과 인신공격을 일삼고 주관자는 이를 합법을 가장하여 로마의 황제 같이 살기위한 검투사의 싸움을 경쟁으로 칭송하며 모든 사회 구조를 뿌리채 흔들고 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는 누가 무어라 해도 겸양을 최우선의 하나로 강조하는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에 근본을 둔 사회 구조를 어떻게 하루 아침에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사회의 경쟁 체제를 도입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까지도 남녀노소가 분명히 차별화되어 있고 심지어 정년이 정해져 있어 아무리 우수한 경쟁력을 가진 사람도 잘 해야 정년까지 밖에 경쟁을 할 수가 없고 정년전의 용퇴를 겸양지덕으로 서로 권하기도 한다. 당연히 경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미국에는 정년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이것은 경쟁의 공정성에 위배됨을 모두가 같이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가는 곳 마다 정년이 있고 기업은 정년까지 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그래도 출연연구소나 대학교수는 정년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모두 대학에 오려고 하고, 이것이 발전의 최고 방해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경쟁 논리를 도입하여 우리 대학사회를 흔들어 놓고 이를 이용하여 즐기는 경쟁의 주관자가 양산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염원하는 노벨상도 정년이 없는 정치분야에서 제일 처음 나온 것을 보아서도 조금 지나치게 이야기하면 우리 과학기술 분야는 정년 때문에 노벨상을 받지 못했고, 또한 못하는 것이 아닌지 무척 걱정이 된다. 실제로 노벨상의 최근 수상자는 그간의 업적을 바탕으로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발전하고 모두가 행복해 하는 사회로 만들자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다. 다만 어떻게 이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그간 영위하고 있는 사회 구조와 새로운 방법론을 제대로 조화시키고 접목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혜안과 식견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요즘 말로 21세기의 비젼이 있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경쟁의 주관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주관자가 경쟁을 유도하고 끌고 나가면 극히 소모적인 주차장이 어떻고 하며 서로의 의견이 무시되었다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일은 없지 않을까? 참고로 버클리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는 연구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별도의 개인주차공간을 NL 표시와 함께 해주고 있는데 이는 경쟁의 승리자에 대한 예우로서 모두들 수긍하고 당연시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어떨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퇴근 길의 발걸음을 버스정거장으로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