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문화 진단] 교육 부족과 무관심으로 인한 토론부재
[대학문화 진단] 교육 부족과 무관심으로 인한 토론부재
  • 김혜리 기자
  • 승인 2000.04.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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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는 ‘카페-필로’라는 장소가 있다. 일반사람들이 와서 철학 이외의 여러 주제로 토론을 갖는 곳으로 현재 200여 군데나 된다고 한다. 카페-필로는 현실문제와 철학문제가 만나는 주제를 가지고서 스스로 생각하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공간으로, 이곳은 프랑스인 스스로가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국민이라 믿게 하는 증거의 하나로 존재한다.

토론이란 무엇인가? 어떤 논제를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각각의 의견을 말하고 나누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독단에 빠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의견까지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게 되며, 그리하여 사회 생활을 하면서 부딪히는 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선택되고 있다.

누구나가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발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든 자연스럽게 토론에 어울릴 수 있지만, 실제 제대로 된 토론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은 대학이 첫 번째일 것이다.
‘지성의 산실’로 불리는 대학. ‘인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다양한 삶의 주제가 늘 존재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과정에서 ‘지성’으로 커갈 수 있는 곳, 어떤 문제에 대해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곳이 우리 학교의 현실이다.

포스비 안의 수준이하의 토론

어느새 과방과 빼곡하게 메워졌던 게시판은 사라졌다. 대중연설도, 공청회도 없다.

대신 사이버 공간에 방이 생기고 게시판이 마련되었다. 대표적인 두 가지가 학교 종합정보시스템 TIMS와 사설비비에스인 PosB이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학생들 간에, 또는 구성원들 사이에 논쟁다운 논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상 TIMS안에는 게시판이라는 소극적인 형식의 메뉴 외에 따로 토론장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래서 사비비이긴 하나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PosB의 대표적 보드인 postechian 보드 안에서 학교내외의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져 여러 이슈와 학생들의 반응을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다. 또 freetalk 보드에서는 다소 학술적인 분위기에서 논리의 타당성을 바탕으로 개진되는 글들이 토론의 형식을 살리고 있다.

그러나 초안의 논점을 흐리는 곁가지성의 re들과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글, 반복되는 주제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고,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무책임하고 진지하지 못한 자세와 그 원인이 되는 익명성 등으로 인한 부정적인 면이 많이 보인다. 또 조성열(화학 2) 학우는 “토론이 아무 대책이나 결론을 남기지 않고 끊기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그야말로 토론을 위한 토론일 뿐이 아닌가.”라면서 쉽게 달아올랐다가 금세 사그라드는 포스테키안 보드의 한계를 말하기도 한다. 토론은 그저 말장난이 아닌 진지한 해결점 모색안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논리적 바탕이 되어야 함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토론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의 한계가 보이는 PosB는 우리 학교 토론문화의 현실이다.

수업시간의 토론은 어떤가?

‘교수 한 명당 평균 6명의 학생’은 왜 좋은가? 수업에 적극 동참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많은 질문과 답이 오갈 수 있고 토론식 수업이 가능할 것 같았던 우리 학교에는 사실 토론식 수업이 거의 없다.

공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교수=마스터, 학생=후학’이라는 공식 아래 객관적인 사실의 가르침과 배움 사이에 토론이 끼어들 틈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주입식 수업을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고 학생들 사이에서 답까지 해결될 수 있는 수업은 커녕 질문하기조차 꺼려지는 경직된 수업 형태는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 또 토론이 가능한 인문사회학부 수업은 대부분이 수강인원이 너무 많아 교양시간으로서 별다른 특색을 보이지 못하는 실정이고 전공수업들은 너무 진도가 빨라 일방적인 설명으로 끝나는 수업으로도 벅차다. 이에 신태경(기계 4) 학우는 “수업을 듣고 레포트를 제출하고 시험을 보면 끝이 나는 이 교육제도가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인간들을 양산해내고 있지 않나”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과학사를 담당하는 임경순 교수는 “토론을 시도해 봤으나 익숙하지 못한 주제를 가지고서는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며 활발한 토론을 위해선 주제 선정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어느 정도의 소양을 갖추어야 학생들 간에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수업 내용에 대한 토론식 수업은 ‘아직’이라는 말이 쉬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은 추세다.

토론이 이루어질 곳은 어디에?

컴퓨터를 껴안고 있는 시간이 많아 사람들을 대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부족한 우리 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토론이 부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만하다.

그래도 학술 동아리나 과내 학술*사과부 에서는 학술성격의 토론이 활발한 편이다. 또 교지편집위원회 청년과학에서도 나름대로 학술회의시간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역량을 기르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동아리나 부서가 아닌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토론이 가능한 곳은 술자리가 될 수도 있겠으나, 술자리 또한 이야기는 있지만 대화가 없고 논의는 있으되 토론은 없는 시대의 분위기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 뻔하게 눈에 비치는 현실이다. 또 학교 안에 비어있는 강의실은 많지만 사람이 모이는 곳은 없다. 편안한 tea time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는다 해도 너무나 바쁜 학생들이 찾아올까 의심스럽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토론 없는 시대의 토론>이란 책을 쓴 이신행 정치학(연세대) 교수는 “‘종속’이란 바로 토론할 수 없는 인격과 사회성을 말한다”고 이야기하며 대학가가 전체적으로 종속적 분위기에 휩쓸려 가고 있다고 했다. 이는 점점 개인주의에 물들어 사회와 타인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진지한 의견탐색 과정을 귀찮아하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가질만한 것은 여타 큰 종합대학에 비해 우리 학교는 여건만큼은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장벽만 넘으면 적극적인 토론의 방법을 모색할 가능성은 많다. 구성원이 뿔뿔이 흩어지는 다른 대학에 비해 대다수의 학생이 드나드는 PosB에서 전교적인 토론교육을 활성화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교수들이 살아있는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노력만 한다면 최상의 수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토론 활성화를 위한 분위기기 조성되어야 한다.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수 간의 부지런한 대화가 오갈 수 있는 자리의 마련을 통해 논리가 앞서고 타의견을 존중할 수 있는 토론문화의 틀을 만들 수 있다. 이는 학생들 스스로 대화에 참여하는 자세에서 비롯될 것이다.

위에서 말한 ‘카페-필로’와 같은 공간이 학교 구석구석에 자리잡히는 날은 우리 스스로가 ‘지성인’임을 자부할 수 있는 날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한 모두의 자각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