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과 윤하, 그리고 포스테키안
김초엽과 윤하, 그리고 포스테키안
  • 백지혜 / 인문 대우부교수
  • 승인 2023.05.1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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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공인 식민지 시대 소설은 밀도 높은 국문학 연구사가 축적돼 있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연구사의 벽에 좌절도 했고, 논문 주제를 잡기 위해 집을 나오기도 했다. 눈에 밟히는 어린 딸을 돌보며 논문 쓰기가 쉽지 않아서, 육아를 하더라도 밤에는 논문을 쓸 개인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살고 있던 아파트 바로 앞에 독서실 같은 공부방을 얻었다. 생활과 공부의 분리라는 명목으로, 신림동의 15만 원짜리 월세방을 얻어 출퇴근했다. 이때 몇몇 학교에서 전공 강의를 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나에게 강의는 하루 종일 갇혀있던 작은 공부방을 탈출할 수 있는 합법적 외출로, 출력한 소논문의 박제된 지식을 누군가와 토론할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의 장이었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가장 오래 한 수업은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의사소통 과목으로 읽기와 쓰기, 토론이 필수적으로 병행된다. 5학기 정도 지나니, 어느 날 문득, 강의실에 앉아 있는 신입생들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부단히 글을 썼던 식민지 작가, 유진오, 이효석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고뇌 어린 열정과 치기 어린 자부심, ‘문청(文淸)’의 성립, ‘지(知)’의 자율성과 같은 박사 논문의 주제가 떠올랐고 1924년 개교한 경성제대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초보 교수자 시절부터 신입생과 함께 한 시간이 실마리가 돼, ‘경성제대 작가의 민족지 구성 방법 연구’에 투영되고 있었음을 처음에는 몰랐다.

논문을 쓰고 우리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친 지도 오래됐다. 우리대학의 ‘글쓰기’ 수업에서는 스스로 관심 있는 주제를 찾고,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이해한 지식을 결합하는 사고의 과정이 중요하다. 자료 탐색 이후 주제를 선택하고, 초벌 개요를 만든다. 그리고 동료평가와 교수 상담을 거쳐 수정한 후 완성고를 제출한다. 이 때문에 수강생의 과학 칼럼을 대상으로 개인별 상담을 진행하는 특징이 있다. 이번 학기 주제는 △인공지능 △반도체 △기후변화 △팬데믹과 감염 예측 △펜타닐 중독까지 다채롭다. 학생들의 많은 원고를 읽다 보면 상담하는 일주일 내지 열흘가량의 시간이 훅 간다. 한 사람당 15분의 상담이 끝날 때, 나는 의례적일지라도 한마디 더 묻는다. “질문할까요?” 한정된 시간이라도 서론과 결론의 조건을 확인하고 본론의 주제어를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날따라 P는 상담 시간이 넘어서도 계속 과학 칼럼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생님, 저는 제가 쓴 이 주제가 너무 좋아요. 우주에 꼭 가고 싶어요.” “무은재학부인데 앞으로 전공하고 싶은 학과는 정했니?” 현실적인 마무리를 유도하는 교수의 질문에 답변을 넘기는 P. “선생님, 저는 양자역학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요. 이건 제가 꼭 연구하고 싶은 주제예요. 언젠가 블랙홀과 사건의 지평선도 이미지 재조합을 통한 인공지능으로 관측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사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에요. 그런데 나사 취직에는 시민권이 필요하다는데요?” 상담하다가 나는 정말로 빵 터졌다. “사건의 지평선과 시민권이라니, 윤하의 역주행을 넘어선 광대한 우주적 상상력인데?” P는 계속 눈을 반짝인다. “선생님 저는 김초엽 작가가 정말 멋져요. 사실 저도 김초엽 작가처럼 글을 쓰고 싶어요. 요새도 계속 글을 쓰고 있거든요.”

이런 맥락 없는 P의 이야기이라니... 사무집기가 가득 찬 건조한 상담실을 찾아온 P. 나는 이날, 꽉 찬 스케줄과 함께 P와의 상담을 진행했지만, 몹시도 반짝이는 눈을 가진 P가 무척 부러웠고, 이 친구를 다시, 어떤 지면에서 볼지도 몰라 무방비 상태의 마음이 조금은 크게 벅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물론 P에게는 과학 칼럼 제출 날짜를 다시 한번 언급해 주고, 주제를 간결하게 한정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했다. 하지만 P는 나에게, 몇 년 전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던, 실제 대학을 구성하는 진정성의 실체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져줬다. 그리고 연구실 책장에 오랫동안 꽂아두고 수정하지 않았으며 읽지도 않았던 한 박사 논문의 존재를 일깨워 줬다. P는 이 오랜 사연의 존재를 전혀 모를 것이다. 상담 시간에는 전하지 못했던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나의 글쓰기 이야기. 지면을 빌려 P에게는 그가 가장 좋아한다던 김초엽 작가의 한 구절을 선물로 주고 싶다.

어떤 기묘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하고, 그 현상의 근거를 끈질기게 쫓아가 보는 것 역시 하나의 유효한 과학적 방법론일지 모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놀라운 진실을 그 길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구 끝의 온실’(김초엽, 자이언트북스, 2021, p.257.)

P의 정주행을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