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검열의 시대, 캔슬 컬처
자기 검열의 시대, 캔슬 컬처
  • 이재현 기자
  • 승인 2023.03.0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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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인물을 향해 공개적인 공격을 가하는 캔슬 컬처
▲논란의 인물을 향해 공개적인 공격을 가하는 캔슬 컬처

한 방송인의 발언이 문제가 돼 대중의 질타를 받고, 결국 해당 연예인이 방송계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최근에는 문제 발언에 대한 비판을 넘어 해당 인물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까지 쇄도하고,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캔슬 컬처(Cancel Culture)’로 불리는 이런 현상은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캔슬 컬처는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이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관점과 일치하지 않을 때 이를 보이콧하고 사회적으로 처벌하려는 관행을 말한다. 특정인의 발언이 조금이라도 논란으로 불거질 조짐이 보이면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보다 해당 인물과의 관계를 빠르게 끊는 것이다. SNS 팔로우를 취소하거나, 그 사람과 관련된 것에 보이콧을 하며 관계를 끊으려는 행위를 ‘캔슬’이라고 한다. 동시에 문제가 있는 언행을 한 인물을 향해 공개적인 공격을 가한다는 점에서 캔슬 컬처는 ‘콜아웃 컬처(Callout Culture, 호출 문화)’라고도 불린다. SNS의 특성상 관계를 쉽게 맺고 끊을 수 있어 지지자들도 한순간에 돌아서 비난하는 경우가 잦다. 예를 들어, 어떤 방송인의 발언이 논란이 되면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방송인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글이 작성된다. 또한,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해당 방송인이 출연하고 있는 방송에서 하차를 요구하는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방송인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캔슬 컬처는 △정치인 △인플루언서 △작가 △교수 등 직업을 막론하고 나타나며, 해당 인물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다.

캔슬 컬처는 미투 운동에서 자신보다 영향력이 큰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피해자는 SNS에 가해자가 저지른 행동을 작성하면서 개인적 보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사람들이 이를 공론화하며 비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와 같은 움직임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나아가 모든 집단으로 확대되며 지금의 캔슬 컬처가 형성됐다.

해외에서는 캔슬 컬처가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로 자리 잡았다. 영국에선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이 성전환자에 대한 견해를 밝히자, 성전환자 인권 운동가들에 의해 집 주소가 유출되고 SNS상에서 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지미 팰런은 20여 년 전 했던 흑인 분장으로 인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말을 들으며 캔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대상은 일반인으로까지 확대됐다. 한 흑인 남성이 개를 산책시키던 일반인 백인 여성에게 입마개 착용을 요구하자, 여성은 거절하며 경찰을 불렀다. 이 사건이 SNS에 퍼져 여성은 직장에서 해고됐다. 이는 해당 행동이 옳고 그르냐와 상관없이 그 누구도 집단적인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갈수록 격렬해져 가는 캔슬 컬처에 대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모든 사람에게는 결점이 존재한다. 돌을 던지는 것은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오바마 전 대통령을 향해 돌아온 것은 ‘그의 발언은 가부장적이며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않는 꼰대’라는 비난의 화살이었다.

이런 현상은 해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웹툰 작가가 자신이 그렸던 그림으로 인해 공개적인 사상검증을 요구받거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특정 성별을 혐오하는 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일종의 불매 운동이 일어난 적 있다. 또한, 한 댄서가 걸그룹의 춤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한 것을 두고 걸그룹을 조롱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대중의 질타가 잇따랐다. 일부 네티즌은 댄서를 향해 외양적 특징으로 인신공격하는 등 도 넘은 비난도 존재했다. 결국 해당 댄서는 사과문을 게시하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런 캔슬 문화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람들이 자신 또한 캔슬의 대상이 돼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거나 외면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자기 검열을 하도록 만든다. 캔슬의 양상이 일관성이 없고 비논리적으로 이뤄진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어떤 인물에 악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고의로 사실이 아닌 정보를 퍼뜨리거나, 앞뒤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한 게시물을 작성할 수도 있다. 이렇게 퍼진 비난성 게시물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전파돼, 당사자가 사실을 바로잡거나 해명하기 어려워진다.

소수자에 대한 과한 혐오 표현을 막고,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시작된 캔슬 컬처는 점차 본래의 취지를 잃고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당연히 잘못된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사실관계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과도한 공격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칠 경우 건설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 스스로가 정말 필요한 비판을 하고 있는지, 혹은 과도하고 비합리적인 비난을 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