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삶의 일부분일 뿐, 조용한 사직
일은 삶의 일부분일 뿐, 조용한 사직
  • 소예린 기자
  • 승인 2022.12.10 0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용한 사직'을 태그로 단 틱톡 영상들 (출처: 중앙일보)
▲'조용한 사직'을 태그로 단 틱톡 영상들 (출처: 중앙일보)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추가 업무를 해야 하나?”, “딱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된다.” 최근 직장에서 주어진 일 이상의 업무를 하겠다는 생각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와 같은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트렌드는 서구권에서부터 시작돼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국내에도 확산 중이다.

조용한 사직은 ‘사직’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과 업무 범위 안에서만 일하고 초과근무를 거부하는 개념이다. 즉 근무에 있어 주어진 최소한의 일과 책임만 하겠다는 태도가 조용한 사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한 사직은 뉴욕의 엔지니어 자이트 칸이 지난 7월 틱톡에서 처음 소개했다. 그는 “실제로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며, 주어진 일 이상의 노동과 열정을 바라는 ‘허슬 문화(Hustle Culture)’를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개인의 가치는 단순히 일의 결과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전했다. 해당 영상은 350만 회 이상의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고, SNS 등지에서 ‘조용한 사직’을 해시태그로 단 게시물이 급속히 늘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조용한 사직 트렌드는 최근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내년 대한민국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로 조용한 사직을 꼽았다. 실제로 국내 직장인 770명을 대상으로 한 잡코리아 설문 결과, 국내 직장인의 10.8%가 회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조용한 사직’을 꼽았다. 또한 ‘개인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업무 시간에만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79.6%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용한 사직 트렌드는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급속히 확산했다. 지난해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한 ‘대퇴직(Great Resignation)’의 연장선으로 조용한 사직이 유행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대퇴직은 코로나19 사태로 구직자보다 기업의 구인자 수가 더 많아짐에 따라 이직이 쉬워졌고, 이에 따라 미국 내 퇴직자 수가 매달 400만 명 가까이 급증한 현상이다. 조용한 사직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한 직장에 모든 것을 쏟지 않으려는 특징이 있다. 즉,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이를 ‘평생직장’으로 삼기보다는 다른 스펙을 쌓고 이직 준비를 하는 것이다.

조용한 사직 유행의 가장 큰 원인은 비대면 업무로 개인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의 삶에서 일에 대한 우선순위가 낮아졌다는 점이다. 또한 노동의 가치 하락으로 과거와 달리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생긴 것도 원인이다. 인사관리 기업 ‘세지윅’의 글로벌 최고 인사책임자 미셸 헤이는 “조용한 사직은 코로나19 사태의 끝자락에서 다수가 겪고 있는 피곤, 좌절과 관련이 있다”라며 원인을 분석했다. 즉 조용한 사직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스트레스 △높은 물가 상승 △치열한 경쟁 등에서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조용한 사직 트렌드가 조직 분위기와 업무 능률을 해치는 ‘오피스 빌런’을 만들어낸다고 보기도 한다. 조용한 사직은 과도한 개인주의와 협동심 결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대부분은 회사에 공동체 의식을 가지며, 높은 강도의 업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했기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기성세대 사이에서 조용한 사직을 하는 직원들에 대한 불만이 표출될 수 있으며, 이는 회사 내 세대 갈등으로 이어진다. 또한, 조용한 사직이 동료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회사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미국의 일부 기업에서는 조용한 사직에 대응해 ‘조용한 해고(Quiet Firing)’를 하기도 한다. △2년 이상 연봉 동결 △승진 누락 △업무 기회 박탈 △업무 피드백 제외 등이 조용한 해고의 징후로 꼽힌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조용한 사직자의 억압과 세대 갈등의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보기보다는, 근본적인 회사 조직문화의 개선이 필요하다. 회사는 조용한 사직자들의 사직 요인을 확인 및 방지할 필요가 있다. 직원이 적절하게 휴식과 연차를 사용하도록 장려함으로써 번아웃을 막는 것이 한가지 예시다. 실제로 많은 기업에서 주 4일 근무제, 휴가지 원격 근무 등의 제도를 도입하며 사내 복지를 확대하고 있다. 또한 회사에 맞는 원칙의 정립과 그에 따른 문제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직원 간 대화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갈등 해결의 핵심 요소 중 하나기도 하다.

조용한 사직에 대해 혹자는 현명한 태도라고 평가하기도, 반대로 무책임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제 조용한 사직 트렌드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됐다. 노동의 가치 하락과 함께 삶에서 ‘일’의 중요도 또한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비판과 억압보다는 조용한 사직자들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 체계 구축과 내적 동기부여와 같은 회사와 개인, 근로자와 고용자 사이의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