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곡골 목소리] 부끄러운 공산주의자
[지곡골 목소리] 부끄러운 공산주의자
  • 정탁영 / 산업 1
  • 승인 1999.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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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생이 된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아침 첫 수업을 째고 그나마 둘째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다녀와서 내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친구의 청탁 때문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지금쯤 나는 컴퓨터 앞에서 서핑을 하거나 오락을 하고 있었을 게다. 도대체 나의 이 짧은 글솜씨로 무얼 쓰라는 건지. 그러고도 또한 거절을 하지 못한 내가 더 바보스럽다. 사실 나는 이 학교에 불만없다. 뭐가 안좋을게 있는가. 시설 좋겠다, 싼 편에 밥 맛있게 나오겠다, 기숙사도 좋겠다, 나는 별 불만을 찾을 수가 없다. 참 자판기 음료수도 꽤 싸지 않은가.

가만 근데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건가. 그러고 보면 나는 우리 대 포항공대에 대해 아는게 없지 않은가. 그저 주는대로 받아먹고, 시키는 거 그냥저냥 해나가고, 있는거 대충대충 써나가면서... 마치 내 일상과 같은 그런 썩어빠진 습관처럼 그렇게 물들어 있는게 아닌가. 이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있는것만 같다.

고등학생시절 나는 공산주의자였다. 훗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밝히기조차 부끄럽지만 그래도 칸은 채워야하지 않은가(그렇다 이미 난 썩은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땐 모든게 다 불만이었다. TV프로를 보건, 학교생활을 하건, 통근시간에 잠시나마 버스에 앉아 있건, 나에겐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나는 공부만 했다. 일체의 다른 썩어빠진 것들을 잊게 해주고 그 때의 그 끓는 가슴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나마 공부밖에 없었다. 연예프로를 보면 반드시 등지고 앉았다. 길을 걷다 우리 할아버지뻘의 노인이 새카만 얼굴로 노동자의 옷을 입곤 큰 짐을 어깨에 매고 그 무더운 여름 밥대신 맛동산을 먹으며 땅에 기대듯 걷고 있는 모습이라도 볼적이면 나는 너무나도 답답한 내 가슴을 풀어줄 길이 없었다.(그래서 사실 나는 술을 일찍부터 시작했다.) 이 학교에 오기 전, 친구와의 술자리에선 항상 나름대로의 내 사상을 펼쳐보았다. 지겨웠겠지만 그들은 귀기울여 주었다.

훗 지금 생각하면 정말 창피하다. 하지만 창피할지언정 나는 왠지 그 때가 부러워진다. 지금은 잃어버린 그때의 내 모습이 너무나 그립다. 몇 천명의 포항공대생 중의 하나일 때보다 몇 백만의 고등학생중 하나일 때의 나의 모습이 더욱 동경스러운건 왜일까. 적어도 그 때는 파묻혔을지언정 나 스스로는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뭐가 불만인지는 알고 있었고 나의 문제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저 살라는 대로 살 뿐이다. 나는 아마도 배부른 돼지가 된 것일까. 그래서 내 스스로가 못마땅하고 늙어보이는 것일까. 그래서 그의 앞에선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것일까.

학교에 대한 불만을 쓰라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생각 끝에 남는 건 내 모습에 대한 불만뿐이다. 이것이 나만의 처지이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학교의 문제점이 아닐까. 나의 이 짧은 소견으로는 내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벅찰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