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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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우 / 화학 18
  • 승인 2022.05.02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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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주사가 하나 있다. 했던 말을 다섯 번 정도 하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온 길바닥에 내 흔적을 남기는 ‘술자리 최악의 주사 TOP 3’에 들어갈 만한 주사는 다행히 아니다. 술에 진탕 취하면 멀쩡히 걸어서 방에 들어가 잘 씻고 침대에 눕는다. 침대에 누우면 오늘 있었거나 요즘에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줄곧 생각한다. 그러곤 감사한 사람이나 힘든 일이 있던 사람에게 글을 쓴다. 쓴 글을 새벽 아주 늦은 시간에 보내 놓고서 잠자리에 든다. 사실 술에 취하지 않은 새벽에도 일어났던 일들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니, 주사라기보다는 버릇에 가깝다. 다만, 글을 쓰는 빈도가 훨씬 낮을 뿐이다.

내가 ‘편지’라 부르는 그런 글을 쓰다 보면 통째로 지우는 일이 잦다. 나는 글 주변이 없어 대개 편지에 내가 느끼는 감사나 위로가 원하는 만큼 드러나지 않는다. 편지의 길이나 표현이 마음을 온전히 전하기 충분하지 않으면 전체를 지우고는 뒤척이며 잠이 든다. “내가 전하고 싶은 감정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테니 글이 더 잘 써지는 다른 날을 노려야겠다”라며 자신을 향한 자기변명과 함께, 나의 부족한 글솜씨는 고마움과 응원의 표현을 언제 다시 시작할지 약속하기 힘든 미래로 미룬다.

어쩌다 이런 버릇을 가지게 됐을까. 내 형편없는 글재주만 매번 확인하는 꼴이니 생각해보면 내게 좋은 버릇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언제부터 가지게 됐는지 알 것도 같다. 지금은 졸업한 선배에게서 받은 하루 늦은 생일 축하 메시지, 나에 대한 따듯한 말만 꽉꽉 모아 담긴 그 메시지로 나는 생일보다 더 기분 좋은 날을 보냈다. ‘나도 저 선배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진심을 하나씩 끄집어내며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사람이 돼야지’ 내가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인 게 분명하다.

말의 힘은 참 위대하다. 주위에서 무심코 던진 말에 누군가는 몇 날 며칠 방에만 박혀 울고, 또 누군가에게는 죽을 때까지 남는 트라우마가 생긴다. 평생을 갈 듯 돈독했던 관계도 말 한마디 때문에 생긴 오해에 쉽게 부서진다. 타인에게 뻗은 주먹은 스스로에게도 통증을 남기지만, 타인에게 뱉은 말은 그렇지도 않다. 말을 내뱉은 당사자는 자각도 못 한 채 상대방에게 큰 멍들을 한가득 남긴다.

그렇다면 따듯한 말의 힘 역시 위대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는 차가운 말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쩌면 평생을 살아갈 원동력이 될 따듯한 말의 힘을 너무 얕잡아 보곤 한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또는 스스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재능이 없다는 변명으로, 내 목구멍 바로 앞까지 차올랐던 말의 영향력을 너무 작게 본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몇 날 며칠이나 어쩌면 평생을 행복하게 할 말을 너무 아껴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