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은 교과서
다시 읽은 교과서
  • 오은진 / 컴공 조교수
  • 승인 2021.11.14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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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컴퓨터공학과 학부 전공필수 과목인 알고리즘을 강의하면서, 십 년 만에 알고리즘 교과서를 다시 꺼냈다. 십여 년 전 학부생 시절에 구입한 이후 여러 차례의 이사를 함께 한 책이다.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나간 지금, 나는 이제 책의 절반을 읽었다. 이미 학생 시절에 여러 번 읽었던 책이지만, 알고리즘 연구를 하는 지금 다시 교과서를 읽으니 책이 새롭게 느껴진다. 사실 학생의 입장에서 알고리즘 과목 자체는 그리 재미있는 과목이 아니었다. 새로운 이론을 배우는 과목이라기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한 테크닉을 배우는 기초적인 과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리즘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교과서를 다시 읽어보니, 다루는 내용은 간단하지만 아름답고, 동시에 컴퓨터 이론 분야에 핵심을 담은 중요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학부 전공필수 과목이 그렇듯, 알고리즘 과목은 어느 정도 체계가 정립돼 세계 어느 대학이든 비슷한 커리큘럼을 갖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사가 오래된 학문 같지만, 컴퓨터 공학의 다른 세부 분야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이론의 역사도 70년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수업 시간에 다루는 내용은 대부분 컴퓨터 이론이 시작된 초기 20년 사이에 발표된 결과들이다. 학생으로 공부하기 위해 책을 읽을 때는 교과서의 내용도 언젠가 논문으로 발표된 적 있는 연구 결과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연구자로서 책을 읽어보니 이 사실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교과서를 읽으며 선배 과학자들이 컴퓨터 이론의 기틀을 쌓으며 했을 노력과 열정이 상상됐다.
박사후연구원 시절, 이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로버트 타잔이라는 노교수와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알고리즘 교과서에도 실린 여러 중요한 결과들을 발표한 교수다. 타잔은 예전에는 컴퓨터 이론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어서 무엇을 하든 의미 있는 연구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 이론의 깊이가 깊어져서, 요즘 젊은 연구자들은 연구하기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이 로버트 타잔의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다루는 컴퓨터 이론이 최첨단의 연구 결과와 비교했을 때 간단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발표된 논문들은 길이가 짧다. 교과서에 실린 결과들이 발표된 논문들은 길어야 네 페이지 정도다. 하지만 해답이 이해하기 쉽다고 해서 그 해답을 찾아내는 것 역시 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간단한 해답이 더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많다. 간단하다는 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문제의 간단하지만 자명하지 않은 풀이는 아름답다.
이 결과들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것이 연구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연구의 시작에 가깝다. 작년 수업에서 한 학생이 질문했다. 수업 시간에 다룬 알고리즘을 더 개선할 수는 없냐는 패기 있는 질문이었다. 그 학생의 예상대로 이 문제의 알고리즘은 개선될 여지가 있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개선됐고, 이에 대한 가장 최신 결과는 올해 1월에 발표됐다. 컴퓨터 이론 분야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중요한 알고리즘 문제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지난 50년간 컴퓨터 이론도 급격하게 발전했고, 책에서 다루는 알고리즘보다 더 효율적인 여러 알고리즘이 발표됐다. 이들은 교과서에서 다루는 내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테크닉을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테크닉은 교과서에 있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우리가 1950년대 연구 결과들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중간고사 전날이다. 아마 수강생들은 지금 교과서를 읽으며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시험을 위해 공부하다 보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내용이 얼마나 근사한지 느끼기 힘들 때가 많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이것은 내가 강의하는 과목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부하다가 지치면 이 결과들을 얻기 위해 노력했을 선배 과학자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학생들도 연구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