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서 배울 선택의 비법
인문학에서 배울 선택의 비법
  • 김종은 기자
  • 승인 2021.01.0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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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은 최소한의 자원과 에너지를 투입해 최대 효율로 결과물을 도출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당신이 태양광 발전기를 제작한다면 금액과 효율 사이에서 계산기를 두드려 가장 적합한 소재와 공법을 찾아낼 것이다. 이후 끊임없는 연구 개발로 소재와 공법을 개선해 제작 시 사용하는 금액은 줄이고, 효율은 증대해야 한다. 이를 실생활에 그대로 적용한 것은 공리주의와도 같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는 선택지를 가장 바람직한 결정으로 여기는 사상이다. 온종일 최소한의 자원과 에너지로 최고 효율을 얻어내기 위한 문제들을 풀고 있다 보면 때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 매몰되기도 한다. 어떤 선택에 동의할지를 단순히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이해관계의 충돌을 보고 있다. 물론 언제나 이해관계의 충돌은 존재했지만, 오늘날에는 수면 위로 올라와 그 살갗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당장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올리는 것만 해도 감염 예방을 위해 접촉은 최소화해야 하지만, 그것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 자영업자들의 생계를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물론 이 사이에서 몇 가지 복잡한 부분을 근사하고 가정을 세운 뒤 계산기를 두드려본다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는 결정을 찾아낼 수 있다. 비록 어떤 자영업자는 파산해 당장 내일의 일상을 위협받고, 국가에서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취하지 않더라도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서는 합리적인 결정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인생은 또 다른 누군가의 근사로 반올림돼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 학부 과정을  졸업하면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연구직에 종사하게 된다. 대학원생이 되건, 기업체에 취직하건 마찬가지다. 결국 전공과목에서 수도 없이 계산해왔던 것처럼 최소 자원의 최대 효율을 끌어내기 위한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듯, 우리는 연구자이기 이전에 사회의 일원이고, 그 이전에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삶에는 최소 자원의 최대 효율 창출이라는 수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넘쳐난다.
우리대학의 많은 교양 과목들이 인문학으로 분류된다. 인문학이란 쉽게 말해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인문학 과목들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근간과 인류가 쌓아온 문명을 문학, 역사, 철학, 예술 등의 분야를 통해 살펴본다. 얼핏 듣기에는 지금까지 공부했던 분야와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원인과 결과를 찾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공학에서는 온도와 압력 조건에 따른 부피의 변화를 찾는다면, 인문학에서는 국가의 역사와 개인의 경험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찾는다. 그리고 인문학에서 새로 배우는 것은 그동안 경험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문제와 입장에 대한 것들이다. 우리대학처럼 우물 안 개구리와도 맞먹을 협소한 군상 속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비슷한 경험을 쌓아 비슷한 목표와 꿈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획일적인 관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로가 가진 와이퍼의 모양이 다르다 해도 같은 방향을 향한 창을 닦아낸다면 결국 한쪽 면만 보이는 것과도 같다.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최소 자원의 최대 효율 창출이라는 수식은 매력적이다. 근사돼 사라질 누군가의 인생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에 더없이 깔끔하고 완벽한 선택을 했다 자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으로 창을 열어준다. 이제껏 관심 두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알고 가치를 부여한 적 없던 것에 가치를 두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보다 온정 있는 사람이 되고 최대 효율의 가치에 매몰되지 않은 인간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