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어려운데, 나만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다들 어려운데, 나만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 이건홍 / 화공 교수
  • 승인 2020.07.1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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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동산에 실을 글을 부탁받았다. 평범한 교수도 다양한 일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릴 기회라고 생각해서 수락했다. 난중일기를 본떠서 간결체로 작성했기에, 독자들이 글을 읽고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초등학교 입학 즈음 군인인 부친을 따라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서 ‘날씨가 허리다’라는 사투리를 극복하는 데 2년이 걸렸다. ‘짧은 글짓기’는 최대 난관이었고 결국 이공계를 전공하게 됐다. 6학년 때 중학교 입시가 없어졌고, 급조된 신설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부친이 쓰러졌고, 모친이 간병하느라 동생과 1년을 살았다. 2학년 때는 이사장과 교장 선생님이 구속됐고, 3학년부터는 학교 이름이 바뀌었다. 인근의 신설 중학교는 폐교됐으니,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바랐던 부친의 뜻과는 달리, 일반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목표는 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공부는 대충, 연애는 열심히 했는데 학사 졸업 후, ROTC 대신 군 면제인 한국과학원(현 KAIST)에 진학해 부친을 두 번째로 실망하게 했다. 석사 후 회사에 들어갔지만, 이란혁명으로 공사 수주를 못 하는 바람에 몇 달째 월급을 못 받았다. 대학은 쉽게 망하지 않음을 알게 돼, TOEFL 시험도 치지 못한 채로 급히 미국 대학에 지원했다.
지도교수를 정하는 면담을 하는데 “통계역학을 아느냐”라고 물었다. “통계학, 역학은 들어 보았다”라고 했더니, “거의 아는 것이다”라며 함께 일하자고 했다. 연구비는 있는데 지원 학생이 없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덕분에 수학은 실컷 공부했다. “Helmholtz의 직계답게 교과서에 실릴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지도교수 때문에 힘들었지만, 결국 내 이름이 붙은 식을 만들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 내 식이 교과서에 실렸다.
1986년 박사 과정 4년 차에 독일로 한 달간 파견을 갔다. 대학 교내에 지하철역이 있고, 모노레일도 있었다. 모노레일은 무인 운행인데, 기계과 학생들과 교수가 설계했다고 한다. 독일로 유학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 비자는 3년짜리였다. 박사 과정 4년 차에 독일에서의 파견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가려는데 독일 Bonn의 미국 대사관에서 새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지도교수가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Joseph Biden에게 부탁하니,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가라고 직접 전화를 줬다. 그러고 보니, 미국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과도 인연이 있었다.
포스텍에 교수로 부임하니, “이론은 빛을 보기 힘드니 실험을 하라”고 주임교수님이 권고하셨다. 문헌 조사를 통해 장래성 있는 분야는 정했는데 아는 것이 없었다. 무작정 세계 최고 대가 3명에게 연락을 했다. “시작하고 싶은데 아는 것이 없어서 방문하겠다”라고 했더니, 3명이 다 환영했다. 온종일 랩도 보여주고, 밥도 사주고, 설명도 해줬다. 첫 논문을 투고했는데, 단번에 accept 됐다. 3명 중 누군가가 심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학회 참석차 파리에도 갔었다. 개선문에서 Avenue Carnot를 따라 걷다가 Carnot Café를 발견했다. 열역학의 아버지를 알아주는 프랑스에 감탄하며 들어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건너편에 Le Grand Carnot Café가 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Avenue Carnot는 대통령을 기념해서 이름 지은 것이라고 한다. Carnot 대통령은 엔지니어였고, 열역학 Carnot의 친척이었다. 반전의 반전이다. 2년 전에 다시 방문하니 Le Grand Carnot Café만 남아 있었다.
마이크로웨이브로 탄소나노튜브를 합성해 특허를 받았는데, 미국 공군으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았다. 다년간 연구비도 받았다. 3년 후에는 UCLA의 Thomas Hahn 교수와 국제 공동연구를 시작했는데, KIST 원장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도중에 중단됐다. 그는 연구에 관한 질의를 하면 3분 이내에 응답이 오는 ‘진짜 연구자’였다.
나노소자에 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얼마 후에 Nature나 Science에 동일한 아이디어로 논문이 나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아이디어 부족이 아니라 Fab이 없기 때문이다. 전자과의 정윤하 교수를 대표로 2전 3기로 나노 Fab을 짓게 됐다. 1,400억 원의 대형 프로젝트로 교수 생활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나노 Fab의 건설을 맡아서 1년간 건설 현장으로 출퇴근했다.
국제 학회에서 15분 발표만으로는 연구를 충분히 소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매년 외국의 유명 랩들을 방문해 1시간 이상 세미나를 했다. 20년이 지나니 분야의 전문가들을 다 알게 됐고, NASA와 공동연구도 생겼다.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서 모든 교수님에게 권하고 싶다.
요새는 캠퍼스 산책을 자주 한다. 아름다운 캠퍼스다. 노벨동산을 지날 때면 박태준 설립이사장의 동상에 묵념하곤 한다. 7080의 사회자로 잘 알려진 배철수 씨의 말이 생각난다. “다들 어려운데, 나만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